전북의 인권 역사 문화 유적지(63)
이번호의 인권역사문화유적지는 완주 정여립 공원입니다.
위치는 전북 완주군 상관면 월암길 37-27 번지에 있습니다.
정여립은 신채호 선생이 극찬한 인물입니다.
정여립(鄭汝立 1546~1589~선조 22) 조선 중기의 사상가. 자는 인백(仁伯)이고, 본관은 동래(東萊)로 전주 출신입니다.
경사(經史)와 제자백가(諸子百家)에 통달하였고, 1570년(선조 3)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이이와 성혼의 문인이었습니다.
1583년 예조좌랑을 거쳐 이듬해 수찬(修撰)으로 퇴관하였습니다. 본래 서인(西人)이었으나 집권한 동인(東人)으로 변신하였습니다.
죽은 스승 이이를 배척하고 박순과 성혼 등을 비판하여 왕이 이를 불쾌히 여기자 다시 벼슬을 버리고 낙향 하였습니다.
고향에서 점차 이름이 알려지고 진안 죽도에 서실을 지어놓고 대동계를 조직하여 신분에 제한 없이 불평객들을 모아 무술을 단련시켰습니다.
1587년 전주 부윤 남언경(南彦經)의 요청으로 침입한 왜구를 격퇴한 뒤 대동계 조직을 전국으로 확대하여 황해도 안악의 변숭복(邊崇福), 해주의 지함두(池涵斗), 운봉의 중 의연(依然) 등의 기인모사를 거느리고《정감록(鄭鑑錄)》의 참설(讖說)을 이용하는 한편 망이흥정설(亡李興鄭說)을 퍼뜨려 민심을 선동하고 모우기 시작하였습니다.
1589년(선조 22) 거사(巨事)를 모의하여 반군을 서울에 투입하여 일거에 병권을 잡을 것을 계획하였습니다.
이때 안악 군수 이축(移築)이 이 사실을 고변하여 관련자들이 차례로 잡히자 아들 옥남(玉男)과 함께 진안 죽도로 도망하여 숨었다가 잡히자, 관군의 포위 속에서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으로 기축옥사가 일어났으며 정여립을 비롯한 동인에 대한 박해가 시작, 천여 명의 지식인이 희생되었고 전라도를 반역향(叛逆鄕)이라 하여 호남인들의 등용이 제한되는 등 조선 최대의 역모사건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천여명의 수많은 선비와 양민의 목숨을 앗아간 기축사화의 희생 당사자인 정여립을 단재 신재호 선생은 '조선상고사총론'에서 군신강산설(君臣綱常說) - 임금과 신하 사이에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를 타파하려했던 동양의 위인이라고 평가하였습니다.
조선시대의 사상가이자 혁명가인 정여립 선생은 "천하는 공공한 물건이지 어디 정한 주인이 있는가?" 하고 그 당시 봉건군주 체제에서 공화주의를 선포했으며 국가(천하)가 공물이라고 주장함으로써 그 주인이 반드시 군주가 아니고 민중이라는 것을 주장했으니 이런 점에서 정여립은 영국의 올리버 크롬웰보다 60년 앞선 세계 최초의 공화주의자였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정여립은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하고, 열녀는 두 지아비를 바꾸지 않는다’는 유교의 윤리관을 여지없이 말살하고, ‘인민에게 해되는 임금은 죽이는 것도 가하고, 행의가 모자라는 지아비는 버리는 것도 가하다’고 하고 ‘하늘의 뜻, 사람의 마음이 이미 주실(周室)을 떠났는데, 존주(尊周:주나라를 존중함)가 무엇이며, 군중과 땅이 벌써 조조(曹操)와 사마(司馬)에게로 돌아갔는데, 구구하게 한구석에서 정통이 다 무엇하는 것이냐’고 하여 공자와 주자의 역사 필법에 반대하니, 그 제자 신여성(辛汝成)등은 ‘이미 참으로 전의 성인이 아직 말하지 못한 말씀이다’ 하였습니다.
절대 군주 시대에 역성혁명과 대동사상, 봉건사상의 타파를 설파한 정여립 선생의 생가를 기념한 정여립 공원은 매우 초라하게 조성되어 있습니다. 공원을 더 넓히고 널리 홍보하는 것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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