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종 18

인권누리 웹진 제193호 회원의 붓

왜 역사의 순리를 거부하는가?백승종(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중종 14년 11월 15일 밤, 갑자기 대궐 안이 시끄러웠다.숙직하던 승지 윤자임이 허둥지둥 나가 보았더니, 영추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근정전에도 불을 밝혔고, 편전 바깥에는 화천군 심정 등이 앉아 있었다.승지들 몰래 중종이 대신을 불러들인 것이었다.왕은 대사헌 조광조와 그의 동료들을 잡아들이라고 명하였다.(실록)조광조 등은 영문도 모른 채 옥에 갇혔다.사흘 뒤 누군가는 이 사건의 실체를 조사해 이미 귀양길에 오른 조광조에게 일렀다.그에 따르면, 남곤과 홍경주 및 심정은 흉흉한 예언설로 중종을 불안에 빠뜨렸고, 사건 당일 밤 신무문을 통해 궐내에 들어와 중종과 함께 거사계획을 논의하였다.그런 다음 그들은 궐 밖으로 나왔다가 연추문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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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합의’가 깨졌을 때 -21세기의 동학운동을 구상하며백승종(역사학자)답답한 현실 ― 역사에 묻노라올해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난 지 130주년이다.그 시절 여러 지역에서 수십만 명의 동학농민이 떨쳐 일어났는데, 온순하기만 하던 그들이 손에 무기까지 쥐고 항거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조선사회의 미덕인 상호부조라는 ‘사회적 합의’가 깨졌기 때문이라고 본다.동학농민혁명을 일으킨 우리 조상들은 농민이었고, 구체적으로는 소농들이었다.그들은 혁명을 일으켰으나 포악한 지배층을 상대로 개인적인 복수를 하지 않았다.대신 혁명 기간 내내 소농들은 유무상자(有無相資)를 실천함으로써 무언중에 새로운 세상을 제안하였다.즉, 재산이 넉넉한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이 서로 돕고 사는 세상을 만들고 있었다는 말이다.동학농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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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시민의 역사 읽기백승종(역사학자, 서강대 명예교수)어느 인터넷 백과사전에서 “원균” 항목을 읽었다.고소설 이 절로 필자의 뇌리에 떠오른다.알다시피 착한 흥부의 모습을 도드라지게 만든 것은 놀부였다.사람은 누구나 오장 육부가 달렸다는데, 작품 가운데 놀부는 심술보라는 기관이 하나 더 달렸다고 한다.그래서겠으나 놀부는 사사건건 동생 흥부를 못살게 굴고 박해하였는 이야기고, 그럴수록 빛나는 것이 바로 흥부의 착한 마음씨였다.한국인이면 누구나 다 아는 도 구성면에서는 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콩쥐의 어질고 착한 심성은, 그와는 모든 것이 정반대인 팥쥐라는 인물의 언행으로 말미암아 선명하게 드러났다.이런 방식의 서사를 우리는 권선징악(勸善懲惡)의 소설이라고 한다.조선 시대는 도덕을 강조하는 유교(儒敎)의 전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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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령군의 역사 - 대통령 일가에 대한 국정조사 필요하다!백승종(역사학자)근현대사를 잘 아는 분이라면 진령군(眞靈君)이라 불린 무당도 기억할 것이다.그는 이씨 성을 가진 무녀로, 이야기는 임오군란(고종 19년, 1882) 직후로 거슬러 올라간다.명성황후가 충주로 피신해 불안을 떨치지 못하였는데, 그때 한 무녀가 찾아갔다.황후는 무녀의 신통력을 확신하고 도성으로 데려왔다.이후 황후는 몸이 불편할 때마다 이 무녀를 불렀고, 그러면 병세가 사라졌다고 한다(황현, ‘매천야록’, 1권).고종 20년, 무녀는 자신의 신통한 정체성을 주장했다.임진왜란 때 명나라 황제를 움직여 조선을 구원한 관우 장군의 딸이라면서, 부디 관우를 섬기게 관왕묘(關王廟)를 지어달라고 했다.그러자 황후는 북악산 아래 숭동(명륜동1가)에 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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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에 대하여...백승종 (역사학자)문장에 대하여 ...문 1: 명문장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알다시피 조선 시대에는 뛰어난 문장가들이 많았다. 사육신 박팽년부터 시작해, 성종 때 성리학의 영수 김종직, 17세기 개성 만점의 지식인 허균, 조선 후기의 실학자 박지원과 김정희 등 누구나 이름을 다 아는 문장가들이 대대로 끊이지 않았다.그들 문장가에게는 다음의 세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고 보면 어떠할까. 첫째, 그들의 글에는 보편적 가치가 담겨있었다.사랑과 우정, 진리에 대한 갈망 같은 것 말이다.문장가들은 물질적 욕망에 휘둘리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고 생각한다.그들은 정신적 가치를 무엇보다도 소중히 여긴 것이었다. 둘째, 명문장가는 개성적 문체의 소유자이기도 하였다. 누구는 간결한 문체를 선호하였고, 누구는 익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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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민족주의의 극복백승종(역사학자)사진은 오늘 현재(2024년 8월 8일) 국가별 메달 집계입니다.독일의 유력 일간지 에 실린 것입니다.표를 보면, 한국(Suedkorea)은 6위로 올라있고, 독일은 10위입니다.아마 40년쯤 전에는 이런 집계표가 어느 나라에서든 신문의 제1면을 장식하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그러나 지금은 달라졌습니다.만 해도 그 변화를 읽을 수 있어요. 메달 집계는 그 신문의 제1면이 아니라, 스포츠 면에만 보입니다.그것도 올림픽에 관한 특집 기사에서만 찾아볼 수 있습니다.물론 어느 나라에서든지 스포츠는 선수 개인의 성취를 넘어 국가의 위상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그러나 "국력은 체력"이라는 식의 군사적인 구호는 이미 사라졌습니다.메달만 많이 따면 강대국이란 인식도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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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없이 너르고 깊은 동학의 하늘 ? 수운 최제우백승종 (역사학자)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1824-1864)라는 평민지식인이 있었어요. 그는 1864년(고종 원년) 3월 10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조선이라는 국가 권력에 의해서 박해를 당한 것이지요. 죄목은 이름만 동학이라 했지 실제로는 ‘서학 죄인’이나 다름없다는 것이었습니다.그 당시 말로는 ‘천주학쟁이’라는 것이었어요. 서양 종교를 믿은 죄로 죽인 셈입니다.이는 물론 잘못된 표현이었지요. 최제우는 결코 천주교 신자가 아니었으니까요. 하건마는 조정의 입장에서는 최제우가 가장 중시한 것이 바로 ‘천주’였지 않아요. 천주라고 하는 존재를 독실히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교단이 바로 천주교였고요. 즉 조정에서 가장 위험시하는 서양 종교에서 ‘천주’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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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민지식인과 동학백승종 (역사학자)올해는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1824-1864) 선생 탄생 2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자연히 여기저기서 동학에 관해 많은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우리가 존경하는 바보새 함석헌(咸錫憲, 1901-1989) 선생으로 말하면, 평소에 동학을 따로 힘주어 말씀한 적은 없었으나 실지로는 누구보다도 동학의 정신적 유산을 소중하게 여기셨다고 생각합니다.‘씨ㅇㆍㄹ’ 사상이야말로 최제우와 그 뒤를 이어 동학을 이끈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 1827-1898) 선생의 가르침과 혼연일체가 아닌가 생각될 때가 많습니다.이것은 저의 억지 주장이 아닙니다.동학의 큰 스승님들과 마찬가지로 함 선생님은 진정한 “평민지식인”이셨어요. 그리고 그분들은 세상의 모든 평민이 스스로 깨우쳐,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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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적 아나키스트” 구파(鷗波) 백정기(白貞基) 선생 백승종(역사학자, 전 서강대 교수) “유교적 아나키스트” 구파(鷗波) 백정기(白貞基) 선생 일제강점기의 항일 독립투사 중에 “백구파(白鷗波)”란 분이 있습니다. 호(號)는 구파요, 실제 이름은 정기(貞基)였습니다. 그분은 어려서는 거유(巨儒) 전우(田愚, 호는 艮齋) 문하에서 성리학을 연구하였으나 장성한 뒤에는 아나키스트가 되어, 항일무장투쟁의 선두에 나섰지요. 동지들과 함께 선생은 중국 상하이(上海)로 갔습니다.그곳에서 활동하는 일본공사와 장성을 제거하려고 하였던 것인데 일이 잘못되어 감옥에 갇히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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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한국의 대학가에 '활기'가 사라진 이유는?백승종(역사학자)평소에 내가 깊이 존경하는 김영 교수님이란 분이 계시다.마침 이 분이 기념 문집의 편찬을 담당한 관계로 '연세-내 젊은 날의 둥지'란 책을 나도 얻어보게 되었다.책에는 오래 전에 빛이 바랜 학과 기념사진이 많고, 젊은 날의 추억을 회상한 수필이 지면에 가득하다.돌이켜보면 1970년대 초반에는 나라 사정이 매우 어려웠다.그때는 4년제 대학교에 진학하는 것 자체가 대단한 특권이었다고 생각한다.70학번이라면 대체로 1950년경에 출생했으니, 6·25세대라고 볼 수 있다.당시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어린아이 가운데서 무사히 대학에 입학한 이는 전체의 3~4%를 넘지 못했다.그 중에서도 명문대학교를 다닌 젊은이는 상위 5%쯤이었다.그렇다면 기준 년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