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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없이 너르고 깊은 동학의 하늘 ? 수운 최제우 |
백승종 (역사학자)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1824-1864)라는 평민지식인이 있었어요. 그는 1864년(고종 원년) 3월 10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조선이라는 국가 권력에 의해서 박해를 당한 것이지요. 죄목은 이름만 동학이라 했지 실제로는 ‘서학 죄인’이나 다름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말로는 ‘천주학쟁이’라는 것이었어요. 서양 종교를 믿은 죄로 죽인 셈입니다. 이는 물론 잘못된 표현이었지요. 최제우는 결코 천주교 신자가 아니었으니까요. 하건마는 조정의 입장에서는 최제우가 가장 중시한 것이 바로 ‘천주’였지 않아요. 천주라고 하는 존재를 독실히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교단이 바로 천주교였고요. 즉 조정에서 가장 위험시하는 서양 종교에서 ‘천주’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는데, 최제우 역시 ‘천주’ 곧 하느님을 섬긴다 하니 이게 문제였지요.
최제우는 자신이 믿는 도(道)가 ‘천도(天道)’요. 자기의 공부는 서학이 아니라 ‘동학(東學)’이라고 천명했건만. 관헌(官憲)은 그의 말을 묵살했습니다. ‘아니야, 아니야. 네가 뭐라고 얘기하든 너는 천주학쟁이야. 너는 나쁜 놈이지. 너는 서양 오랑캐의 앞잡이야!’ 그렇게 해서 최제우는 죽임을 당했던 겁니다.
그런데요. 민간에 전해지는 설화를 구해서 읽어보면 최제우의 죽음에 관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보여요. 그 이야기를 알아보면 대강 이랬더랍니다.
포졸들이 최제우를 잡아들였대요. 그를 오랏줄로 꽁꽁 묶어서 말에 묶었어요. 짐짝처럼 말 잔등에 실었다는 거지요. 하지만 말이 한 걸음도 못 가는 거예요. 서울로 가야 하는데 말의 발바닥이 땅에 찰싹 달라붙어서 떨어지지를 않아요. 최제우의 도술이 워낙 세서 그랬답니다. 포졸들이 아무리 말에게 매질해도 말이 걸음을 떼지 못하니 어쩌겠어요. 고생 고생하다가 겨우 문경 새재까지 어떻게 올라가기는 했답니다. 그러나 서울까지는 절대로 못 올라갔답니다.
그 전설을 더 들어보세요. 갑자기 서울에서 모든 죄인을 풀어주라는 사면령이 내렸답니다. ‘죄인을 데려오지 마라. 풀어줘라’ 이랬다는 거지요. 그랬다가 얼마 뒤에 다시 체포령이 내렸다고 해요. 그리고 반드시 목을 베어 죽이라는 명령이 내려왔대요. 그래서 대구 감영에서 최제우의 목을 베려고 칼을 뽑아 그 목을 쳤어요. 그러나 최제우의 목은 멀쩡하고 칼만 부러지더랍니다. 설화가 그렇습니다. 물론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있는 말입니다.
서울에서 내려온 금부도사가 초조했겠지요. 왕의 명령을 어떻게 해서든 집행해야 하는데 방법이 없어서 최제우에게 싹싹 빌었답니다. “최 선생님, 제발 좀 죽어주시오. 내가 당신을 못 죽이면 도리어 내가 죽어야 할 판이라오. 당신이 나를 불쌍하게 여기시면 좀 죽어주시오.” 그러자 최제우가 하는 말이, “음, 그렇게 하자. 내가 널 불쌍하게 여기므로 죽어주기로 하마. 내 겨드랑이를 열어보면 거기에 비늘이 세 장 붙어 있을 것이다. 그 비늘을 다 떼고 나서 칼질을 해봐라. 그래야 내 목이 칼을 받을 것이다. ” 과연 그 말대로 겨드랑이 밑에 반짝이는 비늘이 있더랍니다. 잉어 같은 생선에 붙어 있는 것이 비늘이잖아요. 포졸들이 최제우의 비늘을 떼고 목을 쳤더니 그제야 목이 떨어지더랍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 수군거리기를, 최제우는 명이 다해 돌아가신 것이 아니다. 남을 불쌍히 여겨서 죽어준 것이다. 그런 말을 사람들이 서로서로 전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구전 설화’지요. 구전이라고 하는 것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것인데, 여러분은 이런 이야기를 듣고 나면 무슨 생각이 듭니까? 구전은 거짓인가요, 아니면 진실인가요?
『성경』에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은 다음, 사흘 만에 부활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중에는 산 채 하늘로 올라갔다고도 하지요. 기독교인들에게는 이런 이야기가 어김없는 종교적 진실입니다.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은 수긍하기 어려운 일이겠지요. 최제우의 죽음에 대해서도 비슷한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는 과연 죽어 준 걸까요, 아니면 죽임을 당한 걸까요? 많은 사람이 보기에는 무력하게 죽임을 당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동학교도의 눈으로 보면 얼마든지 달라져요. 종교적 진실이라고 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어요. 그럼 역사적 사실이 아닌데도 종교적 진실이 된다는 말입니까? 여러분은 제게 그런 질문을 하고 싶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참으로 난감한 일인데요.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종교적 진실이란 대개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는 것으로, 눈이나 귀 같은 인간의 감각기관으로는 확인하기 어려운 것이지요. 우리가 눈으로 볼 수는 없어도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일이 있는 법입니다. 그럴 때 과연 어느 것이 더 소중합니까. 사람에 따라 차이는 있겠으나, 눈으로 확인하는 것보다는 마음으로 절실하게 느끼는 것이 더 우선일 때가 있습니다.
종교적 진실 가운데는 역사적 사실로 입증되지 않은 것이면서도 사실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인간의 의지와 소망이 서린 것이 많아요. 만약 거기에 인간의 희망과 신념이 오롯이 담겨 있다면 어떻게 보아야겠습니까? 함부로 무시하기 어려운 일이 되지요. 최제우가 허망하게 죽어서는 절대로 안 되겠다는 믿음, 그것이 최제우를 따르는 제자들의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예수가 허무하게 동굴 안에서 썩지 않기를 바랐던 것도 그를 충심으로 섬기던 제자들의 뜻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이런 염원이 강렬하다면 죽은 최제우도 우리 마음속에는 영원히 살아 있을 수 있습니다. 다른 종교의 일도 다를 이유가 없습니다. 누군가의 마음속에 뚜렷이 살아 있으면 그것이 참으로 살아 있는 것이지요. 어떤 사람이 죽어서 정말 한 줌의 흙이 되었는지, 그 여부를 따지는 것은 오히려 사소한 일입니다.
이야기는 훗날의 일이 되지만, 1980년 5월 18일에 광주에서 민주항쟁이 일어났습니다. 이른바 광주민주화운동이었지요. 이 운동은 성공했습니까, 아니면 실패했습니까? 만약에 그 실패와 성공을 당대의 짧은 며칠에 한정하기로 하면, 그때 민주화운동은 명백히 실패한 것으로 봐야지요. 제가 가장 사랑하는 가수 정태춘의 노래 ‘5.18’을 잠시 떠올리면 어떻겠습니까? 그날 광주의 높은 건물 옥상에는 진압군이 있었잖아요. 저격수도 있었잖습니까. 그들이 우리의 청년들을 다 쏴 죽였잖아요. 탱크로 시민들을 무참히 뭉개버렸잖아요. 그럼 광주시민은 진압군에게 완전히 무너지고 만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오월에 광주의 민주시민들이 진압군에게, 아니 압제자에게 허무하게 지고 말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그럼 실제로 군인이 민중에게 진 것입니까? 대답이 쉽지 않습니다. 그날 그 자리에서는 시민이 진압되었지요. 그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품었던 민주화를 향한 의지와 열망은 1980년대의 대학가를 계속해서 달구었습니다. 바로 그런 학생운동의 힘으로 30여년 동안 계속되어온 군사독재의 길고 완강한 흐름이 끝장나고 말았습니다. 결국에는 민주화운동세력이 잔인무도한 압제자들을 물리쳤다는 말씀입니다.
마찬가지였습니다. 1864년 꽃피는 봄날에 최제우가 목이 잘린 채 죽었느냐, 안 죽었느냐 하는 문제도 결국 같은 것이지요. 최제우의 삶을 하나의 생물학적 개체로만 본다면, 그는 그날 댕강 목이 잘린 채 인생의 종지부를 찍었다고 봐야 옳지요. 그러나 그런 사실 따위가 중요할 리가 없습니다. 최제우라는 위대한 스승이 사후에도 만인의 가슴속에 찬란한 빛으로 살아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예수가 부활했다고 하는 것도 엄연한 종교적 진실이고, 최제우가 금부도사를 불쌍히 여겨 스스로 목숨을 버렸다고 말하는 것도 또한 종교적 진실입니다. 이와 같은 이치로, 최제우가 하느님을 만났다고 하는 것도 종교적 진실이요, 하느님의 편지를 받았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종교적 진실이라고 하는 것은 세상의 일반적인 사실과는 비교할 수가 없는 신비한 것이지요. 세상 차원의 얘기가 아니라, 종교적 차원에서 하느님의 얘기를 처음으로 꺼낸 것은 물론 최제우가 아니었어요. 지식의 계보학이란 관점에서 말해봅시다. 아주 까마득한, 먼 옛날부터 한국인들은 하늘과 소통하길 바랐어요. 우리 조상님들은 늘 하늘과 소통했다고 믿기도 하였지요. 지극한 정성만 갖추면 언제라도 하늘과 소통할 수 있다는 믿음이 항상 건재하였어요. 그럼 하늘과의 소통이 문자로 명시된 것은 언제일까요. 최제우의 지식으로 미루어 보면, 유교의 경전인 사서삼경이 바로 그러한 문서였습니다.
최제우가 살았던 시대, 곧 조선의 유교는 성리학이었고요. 성리학자들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천명(天命)’에 부합하는 삶이었어요. 천명을 그대로 따라서 살 수만 있으면 최상의 삶이었던 거지요. 천명이란 문자 그대로 하늘이 인간에게 내리는 명령이란 것인데요. 냄새도 없고 색깔도 없으며 형체도 없는 하늘이 어떻게 뜻을 표현한다는 말인가요? 뛰어난 성리학자 집안의 아들로 자란 최제우는, 청소년 시절에 이미 성리학의 근본 경전인 『중용』을 배웠지요. 그 점은 의심할 여지도 없어요. 바로 그 책에,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이라고 했어요. 하늘의 명령을 우리는 ‘성’ 또는 본성이라 한다는 말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인간의 본성은 하늘이 주신 것이라는 뜻이지요. 하늘이 주신 본성의 특징을 일찍이 맹자는 열심히 연구했고, 그런 끝에 ‘성선(性善)’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이겠습니다. 하늘이 주신 인간의 본성이 지극히 선하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이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겠습니까? 이 점 역시 최제우는 어린 시절에 아버지로부터 배운 『대학』에서 답을 발견했을 테지요. 큰 공부의 길은 ‘명명덕(明明德)’하고 ‘신민(新民)’ 또는 ‘친민(親民)’하고, ‘지선(至善)’하는 것이지요. 이게 무슨 말인가 살펴보겠습니다. 밝은 덕을 밝히고,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을 다 깨어나게 만들어 세상을 새롭게 하거나, 그런 백성들과 함께 친하게 지내야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지극히 선한 단계에 도달하는 것이 옳다고 보았어요. 요컨대, 나라고 하는 한 개체가 각성하여 집단의 각성을 이끌고, 집단의 각성이 새로운 공동체의 탄생으로 가는 것이 공부의 가장 큰 목표라는 이야기입니다.
최제우의 아버지인 근암 최옥(崔?)은 영남의 큰 학자였어요. 아들 최제우는 아버지로부터 성리학의 정수를 차근차근 배웠어요. 근암으로 말하면, 학문과 문장에 뛰어난 선비여서 『근암집』(6권 3책)이란 저술을 남기기도 하였지요. 경주 지방의 대학자였던 겁니다. 아버지로부터 습득한 성리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최제우는 하늘의 의미를 터득했다고 봐야겠습니다. 그는 하늘이라고 하는 것이 더없이 소중한 것이요, 인간의 삶에 근본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절대적인 요인이라고 깨달은 것이었어요. 최제우가 아버지에게서 배운 여러 권의 유교 경전들, 가령 『대학』 『논어』 『맹자』 그리고 『중용』은요, 이미 수백 년 동안 이 땅에서 수많은 사람이 읽고 외운 책들입니다. 다들 그런 책을 가르치고 배우며, 그런 지식을 실천할 궁리를 하였어요. 그러나 최제우와 다른 분들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었지요. 다른 사람들은 그런 좋은 책에 나오는 하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하여, ‘좋은 말씀이다’라고 감탄만 하고는 그냥 넘긴 거였죠. 그러나 최제우는 달랐습니다. ‘이 가르침이 나의 문제, 우리 시대의 문제, 우리 인간의 문제, 세상 만물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본질적인 차이가 있어요. 잠재적인 싹은 이미 다 있었어요! 그러나 누구도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지는 못했습니다. 여러분은 아마 콜럼버스의 달걀 이야기를 아실 겁니다. ‘달걀을 세워봐라!’ 아무도 세울 줄 모르지요. 그러나 콜럼버스는 달걀 한쪽 모서리를 딱 쳐서 귀퉁이를 뭉툭하게 만들고는 세웁니다. ‘에이, 그거 누가 못 해.’ 마찬가지 일이 아니겠어요! 유교의 가르침 속에 이미 동학의 하늘이 들어있는데도, 최제우처럼 진지하고도 새롭게 뜻을 새긴 사람이 아직 없었던 것입니다.
최제우는 그럼 어떻게 그런 신통한 생각을 하게 됐을까요? 이 점이 우리의 고민거리가 되는데요.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최제우에게 큰 자극을 줬던 것은 ‘서학’이라고 말입니다. 천주교, 즉 기독교의 역할을 무시하기 어렵다고 봐요. ‘왜 저 사람들은 천주를 믿을까? 왜 저 사람들은 천주님께 기도할까? 왜 저 사람들은 천주께서 문제를 해결해주기를 바랄까?’ 이런 문제들을 최제우는 깊이 고민했어요. 그런 과정에서 그는 천주라고 하는 것이 서양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깊은 깨달음에 도달한 거죠. ‘천주는 이미 우리 안에 있었다. 우리는 천명을 받은 사람들이다. 우리에게 하늘의 상제(上帝)가 계시는데, 하느님을 달리 어디에서 구하겠는가?’ 그는 이렇게 생각했던 겁니다.
서양의 종교 서학을 최제우는 나름대로 깊이 탐구해봤습니다. 그리고는 서양의 종교에 근본적인 약점이 있다고 확신했어요. 최제우의 관점에서 보면 서학은 바람직한 종교가 되지 못했어요. 그런 주장은 『동경대전』에 다 나와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서양의 종교인 서학에는 ‘안으로 신령(神靈)이 없고 밖으로 기화(氣化)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안으로 신령이 없다고 했는데, 신령이 무엇인가요? 신령이란 기독교적 개념으로 말한다면 ‘영성’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요. 조금 친절하게 말해, 천주교를 열심히 믿어도 하느님과 소통한다는 증거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최제우는 그렇게 판단했어요. 천주교 신자들이 보기에는 최제우가 아마 잘못 본 것이었겠지요. 그럼 밖으로 기화가 없다는 것은 또 무슨 뜻일까요? 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유교 공부를 한 사람은 누구나 알 텐데요. 변화를 뜻하는 ‘변(變)’이란 글자는 약간 변화하는 것을 가리켜요. 작은 변화가 변인 것이지요. 아주 큰 변화를 ‘화(化)’라고 합니다. 그럼 기화라고 하는 것은 무슨 변화겠어요? 그것은 말로는 이루 다 묘사할 수 없이 엄청나게 큰 변화입니다. 곧 후천개벽(後天開闢)입니다. 요컨대 최제우는 자신이 서학을 믿는 신자들을 자세히 관찰해본 결과 그렇더라는 것입니다. 그가 그릇된 판단을 내렸다고 볼 수도 있겠지, 하여간에 최제우는 그렇게 확신한 거예요. 최제우가 검토해봤더니, 천주교 신자에게는 영성도 부족하고, 그 사람들의 사고와 행동, 즉 인격에 본질적인 변화가 보이지 않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최제우는 서학이 부족한 종교라고 확신한 거였어요. 참 종교가 되려면 바로 이 두 가지 요건을 갖춰야 한다고 최제우는 확신했어요. ‘신령스러움도 있어야 하고, 기화도 있어야 한다. ’ 이러한 종교적 깨달음을 가지고 최제우는 스물한 자의 ‘시천주’ 주문을 만들었어요. 역시 『동경대전』에 나와 있는 이야기입니다.
시천주 주문 가운데서 핵심이 되는 것은 13자였어요. ‘시천주(侍天主) 조화정(造化定) 영세불망(永世不忘) 만사지(萬事知)’라고 했어요. 이 주문을 가만히 앉아 열심히 외우면 마음의 문이 열린다. 신령스러운 체험을 하게 된다. 그런 내적 체험이 쌓이면 그 사람의 인격 자체가 근본적으로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시험할 필요도 없이 최제우는 자기 자신에게서 그러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스스로 목격했어요. 제자들에게 시험 삼아 해보았더니 제자들에게도 똑같은 변화가 나타났던 거고요. 그래서 이것이 참된 길이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동학에서 말하는 하늘은 유교를 비롯한 동양 고전은 물론이고 서학과도 뿌리가 연결되어 있었어요. 동학의 하늘은 허무한 관념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종교적 체험을 통해 확립된 것으로, 완전히 새로운 개념이었던 것입니다. 수운 최제우의 탄신 200주년에 잠시 그의 삶과 가르침을 두서없이 헤아려 보았습니다. 참으로 부족한 글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아낌없는 질정(叱正)을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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