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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한국의 대학가에 '활기'가 사라진 이유는? |
백승종(역사학자)
평소에 내가 깊이 존경하는 김영 교수님이란 분이 계시다. 마침 이 분이 기념 문집의 편찬을 담당한 관계로 '연세-내 젊은 날의 둥지'란 책을 나도 얻어보게 되었다. 책에는 오래 전에 빛이 바랜 학과 기념사진이 많고, 젊은 날의 추억을 회상한 수필이 지면에 가득하다.
돌이켜보면 1970년대 초반에는 나라 사정이 매우 어려웠다. 그때는 4년제 대학교에 진학하는 것 자체가 대단한 특권이었다고 생각한다. 70학번이라면 대체로 1950년경에 출생했으니, 6·25세대라고 볼 수 있다. 당시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어린아이 가운데서 무사히 대학에 입학한 이는 전체의 3~4%를 넘지 못했다. 그 중에서도 명문대학교를 다닌 젊은이는 상위 5%쯤이었다. 그렇다면 기준 년도인 1950년생 한국인으로 학교 성적이 상위 0.015~0.02% 안에 드는 그야말로 특별한 소수의 사람, 즉 ‘대한민국 수재들’의 이야기가 문집을 메우고 있는 셈이다.
상처투성이인 우리 현대사의 참모습
나는 평생 역사 공부를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김영 교수님에게서 이 책을 얻어 읽게 되었을 때도 사료(史料)를 대하는 마음이었다. “여기에 바로 한국 현대사가 있구나!” 책을 읽으며 내심 탄성을 지르기도 하였고, 주인공이 겪은 엄청난 고통에 나도 모르게 한숨을 몰아쉬기도 하였다. 이제 독서 중에 얻은 두어 가지 감상을 적어본다. 첫째, 문집의 주인공들은 대체로 무거운 역사의 수레바퀴에 치여 온몸이 부서지거나 적어도 팔다리 하나쯤은 부러지다시피 하였다는 느낌이다. 지독한 가난, 치가 떨리는 끔찍한 독재 또는 벗어나기 어려운 병마로 고통받은 흔적이 책의 곳곳에 배어 있다.
1970년대 초반에도 한국사회는 혼란의 구렁텅이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이 나라 최고의 수재들이라도 그 시절에는 하루에 삼시 세끼를 편안히 먹지 못하였다. 그들은 취미 생활 같은 것을 제대로 즐기지 못하였다. 그때는 청춘이라고 태평세월을 보낼 수도 없는 처지였다. 청년들은 하루하루를 고통 속에 보내며 안팎의 적과 싸워야 했다. 상처투성이인 우리 현대사의 참모습은 이와 같았다.
둘째, 그렇건마는 책의 주인공인 70년 학번은 마치 '항복'이란 단어조차 모르는 타고난 투사처럼 온 힘을 다해 싸웠다. 비록 그중 적지 않은 수의 청년은 사선(死線)을 넘지 못하고 도중에 좌절하였으나, 대다수는 기적처럼 끝까지 살아남았다. 문집에서 내가 만난 생환자(生還者)들이야말로 오늘의 한국을 이룩한 영웅들이다. 나에게 이 책을 준 김영 교수님도 예외가 아니다.
온통 황금에 중독...대학에서 뜻을 기르고 꿈을 키우는 방법 잃어버린 듯
대학 시절 김 교수님은 <연세자유교양회>라는 일종의 독서회에서 활동하였다. 그분은 2학년 때 박정희 정권의 폭주를 직접 목격하고, 처참한 역사적 현실을 깨닫고 나라를 바로잡을 궁리를 하며 부지런히 책을 읽었다고 말한다. '독서불망구구(讀書不忘救國)', 즉 책을 읽으며 나라를 구할 뜻을 잊지 않는다는 구절을 누군가 붓글씨로 크게 써, 독서회의 벽에 붙여두고 자나 깨나 나랏일을 걱정하였다고도 했다. 젊은 시절에 한편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성찰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 세상의 잘못을 뜯어고치려는 의지를 불태웠다는 청년 시절의 이야기가 참으로 진지하다. 대학 시절에 마음속에 새긴 이런 실천 목표를 70대 중반에 이른 지금까지도 견지하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김 교수님 한 사람의 복(福)이겠는가. 우리 모두에게 크나큰 축복이다.
끝으로 한 마디 힘주어 말한다. 이 책에서 나는 우리 현대사의 새길을 연 여러 영웅을 만났다. 그분들 가운데 누구는 이름 석 자만 대면 다들 알만한 분들이요, 다른 분들은 저명하지는 않아도 진정한 의미에서 존경심을 가지게 만든다. 훌륭한 대학이 있었기에, 그것을 둥지 삼아 봉황새도 나오고 공작새와 독수리도 여럿 배출된 것이리라. 그토록 어려운 시절에도 대학다운 대학들이 여기저기 있어서 귀한 인물이 길러졌다는 사실이 놀랍다.
오늘의 대학은 과연 어떠할까. 모든 것이 풍요로운 지금, 설사 걱정이 있다고 한들 그 옛날에 비하면 도리어 사소한 문제일 것 같은데도 현실은 그렇지 않다. 21세기 한국의 대학가에는 활기가 사라지고 말았다. 지금은 가르치는 사람이나 배우는 사람이나 학교의 안이나 밖이나 온통 황금에 중독되고 만 것인지. 사람들은 대학에서 뜻을 기르고 꿈을 키우는 방법을 잃어버린 듯하다. 이것이 그저 나의 쓸데없는 기우(杞憂)라면 다행이겠다.
/백승종 객원논설위원(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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