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누리 뉴스레터

인권누리 웹진 제90호 회원의 붓

인권누리 2022. 12. 28. 10:28

넘어질 결심

넘어질 결심

정관성



일제강점기에 학생들은 요즘처럼 추운 계절에도 주머니에 손을 넣을 수 없었다고 한다.
황국신민으로 성장하려면 어려움을 참고 몸을 단련해야 한다는 이유로 추워도 손을 주머니에 넣지 못하게 강요했다.
엄동설한에 추위와 설움이 얼마나 컸을까.
요즘은 일제강점기도 아니고, 추위로부터 신체를 단련할 일도 없지만 주머니에 손을 넣고 다니지 말라 한다.
미끄러운 눈길에 넘어지면 부상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주머니에 손을 넣고 다니다가 넘어지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질 수 있다고 한다.
넘어질 결심이 섰다면 주머니에 손을 넣고 다녀도 된다.
작년 요맘때 손녀딸을 본 누나는 며칠 전 돌잔치를 한다고 했다. “꼬맹이가 이제 한두 걸음 걷다가 주저앉아.
곧 걷겠어.” 누나는 작고 앙증맞은 손녀가 걸음을 떼고 걷고 달려와 할머니 품에 안기는 모습을 상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 귀여운 꼬맹이는 걷다 넘어지는 일을 여러 번 반복해야 한다. 넘어질 결심을 하고 하는 행동은 아닐 것이다. 걷겠다는 결심은 있을 것이다.
우리는 넘어져야 하고, 넘어지지 말아야 한다. 시인 김수영이 노래한 시에서도 풀은 먼저 눕고 먼저 일어난다.
넘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며, 넘어지고도 일어서기를 반복해야 한다. 잘 넘어져야 잘 일어난다.
그렇게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하다가 우리는 결국 딱 한 번 넘어지는 것으로 인생을 마감한다. 마지막 넘어진 것은 좌절과 패배인가. 아니면 자연스러운 과정인가.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면 그만이다. 참 말로는 쉽다. 오뚝이처럼 매번 일어나면 세상은 참 쉽고 재미있을 것이다.
운동선수는 넘어졌다가 일어나서 상대를 쓰러뜨리면 그만이고, 학생은 떨어진 성적을 딛고 다시 공부해서 더 나은 성적을 거두면 그만이고, 연인과 헤어진 슬픔을 딛고 재결합하거나 다른 상대를 구하면 된다.
이렇게 쉬운 세상을 왜 그리 어렵게 살아가는가.
넘어진 상태로 태어난 사람이 있다. 걷기를 시도할 수 없을 정도의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 있다.
한 번 넘어졌을 뿐인데, 그 후로 영영 일어서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가난하게 살다가 가난하게 죽는 사람이 있다.
전쟁터에서 태어나 전쟁터에서 죽어가는 아이가 있다. 이들에게 “왜 일어서지 못 하는가” 따지고 비난하는 것이 합당한가.
이들에게 일어설 의지가 부족하고 노력이 부족하다고 몰아세울 수 있는가.
매서운 바람 불어오는 한국 땅. 여기서 넘어진 자들을 비난하고 욕하는 자들이 있다. 같은 인간으로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이동할 권리를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출퇴근 방해꾼이라는 이름을 붙여 욕하는 자들이 있다.
이들은 이동이 불편한 사람들을 자기와 다른 배척할 대상 취급을 한다. 세상 누구도 영구히 자신의 신체적 완전무결을 장담할 수 없다.
유모차를 밀고 다니다가 보행보조기를 지원받아 밀고 다니는 우리의 부모님들은 이동권에서 자유로운가.
걸음 빠른 자식이 보조기 밀며 따라오는 부모님에게 욕하고 비난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
10월 29일에는 용산에서 참사가 벌어졌다. 자신들의 즐거운 추억을 만들고자,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던 소중한 인격체였던 사람들 158명이 넘어져서 세상을 떴다.
어제는 성탄절. 녹사평역 앞 시민분향소에서 미사를 올리는 시민들 앞에서 시끄럽게 방해하는 자들이 있었다. 넘어져 사망한 사람들의 유족들까지 쓰러뜨리고 싶은 모양이다.
왜 평범한 일상이 참혹한 참사로 이어졌는지 밝히고 싶은 사람들 모두를 쓰러뜨리고 싶은 모양이다.
세월호 진상규명을 외치던 김영호 씨의 단식장 앞에서 통닭을 먹던 자들이다.
그들의 넘어진 영혼은 언제 일어날까. 육신이 넘어지더라도 정신이 넘어지지 않으면 우리는 넘어지지 않은 것으로 본다.
재산이 적어 가난하더라도 마음을 나누는 사람들의 마음은 부자라 한다. 돈이 많아도 남들 보기에 부끄러운 짓을 하는 자들에게 우리는 정신이 썩어 빠진 자라고 한다.
불편한 몸이지만 서로를 의지하며 연대하는 사람들은 결코 넘어질 수 없다. 국가가 막지 못한 참사의 원인을 밝히고 재발 방지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은 똑 바로 선 사람들이다.
누가 넘어진 자고, 누가 일어선 자인가. 장애인 이동권을 방해하기 위해 전철을 무정차하는 오세훈 서울시장이 넘어진 자고, 용산 참사를 덮으려 애를 쓰는 윤석열, 이상민, 정부여당을 우리는 정신이 폭삭 무너진 자라고 한다.
넘어지면 많이 아프다. 다시 일어날 힘을 얻기까지 시간도 상당히 걸린다. 지금 철저하게 무너진 정신머리로 국민들을 우롱하는 자들은 더 크게 넘어지고 더 크게 좌절하기 전에 생각해 볼 일이다.
“우리 지금 <넘어질 결심>으로 이러는 것인가?” 식민지 백성에게 주머니 손을 넣지 못하게 하여 자기들의 총알받이로 키우고자 했던 자들의 패망을 되새겨 보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