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의 인권 역사 문화 유적지(94)
이번호의 인권역사문화유적지는 동학혁명의 3대 장군 손화중 장군묘역입니다.
위치는 전북 정읍시 상평동 산 134번지에 있습니다.
손화중(孫華仲)의 본관은 밀양이며 이름은 정식(正植), 자는 화중(華仲, 和中, 化中), 호는 초산(楚山). 1861년 6월 22일(음력) 정읍 과교리(현 정읍시 과교동)에서 출생했으며,
1881년 처남 유용수(柳龍洙)를 따라 지리산 청학동에 갔다가 동학에 입도하여 수도하였습니다.
수도를 마치고 1883년 고향 정읍으로 돌아와 동학을 포교하였습니다. 정읍군 내 농소리, 입압리, 신면리, 음성리 등지를 돌아다니며 포교하다가,
인근 고창군 무장면(茂長面)에 들어가 김모씨의 집에 포교소(布敎所)를 설치하여 동학 포교를 본격화하였습니다.
후에 접주가 되어 1892년 전라북도 삼례(參禮)에서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이 일어나자 많은 교도들을 동원하여 참여시키기도 하였습니다.
1893년 서울 광화문 복합상소(伏閤上疏)가 이루어질 때는 호남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습니다. 충청북도 보은 장내리(帳內里) 집회에도 많은 교도들을 동원하는 등 동학 지도자로서의 능력을 크게 발휘하였습니다.
손화중은 선운사 도솔암 암벽불상에 있다는 검단대사와 비결록을 꺼냈다는 데서 신비의 인물로 알려져 있으며, 전봉준, 김개남, 김덕명, 최경선 등과 함께 1894년 동학농민혁명을 이끌었습니다.
1894년 동학군의 전주화약(全州和約) 후에는 전라남도 나주(羅州) 지방으로 가서 폐정개혁(弊政改革) 운동을 지도하였습니다.
제2차 동학혁명운동을 일으킨 1894년 10월에는 일본군의 배후상륙에 대비하여 최경선(崔景善)과 함께 나주 부근에 주둔하여 일본군을 경계하였습니다.
전봉준(全琫準)의 공주(公州) 공략이 실패한 뒤에는 나주성을 공격하였으나 지형관계로 또 실패하였습니다. 12월에 일시 광주(光州)로 후퇴 입성하였다가,
정부군의 압박을 받고 그 후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興德)으로 되돌아왔습니다. 여기서 이모씨의 재실(齋室)에 숨어 있다가,
1895년 1월 6일 재실지기 이봉우(李鳳宇)의 고발로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전주 감영(監營)으로 압송되었다가 서울로 이송되었고,
여러 차례의 심문 끝에 전봉준, 김덕명(金德明), 최경선, 성두환(成斗煥)과 함께 처형되었습니다.
손화중 묘역은 1996년 후손에 의해 조성되었고, 둘레석을 두른 봉분, 제단, 비석 등이 세워져 있습니다.
묘소 앞 좌우에는 문인석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묘 입구에는 〈동학농민혁명지도자 손화중 장군 묘〉 안내문이 설치되어 있고,
묘소 오른 쪽 앞에는 〈갑오총령밀양손공화중선생지묘(甲午摠領密陽孫公華仲先生之墓)〉라고 쓰여진 비석이 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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