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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누리 웹진 제92호 회원의 붓

인권누리 2023. 1. 9. 10:08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정관성 -

새해 덕담이 오간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새해 건강하세요.”, “새해 사업 번창하시길 바랍니다.”, “새해 대박 기대합니다.” 반가운 인사와 덕담에 마음이 따스해진다.
상대방은 나에게 참 좋은 일이 많아지길 바라는구나. 상대에게 화답하는 마음도 훈훈하다. 새해가 되면 서로 밝은 얼굴로 웃으며, 우리의 공동체가 맺은 유대관계의 돈독함을 확인한다.
생태사회학자 최재천 교수는 “생물은 서로 돕지 않고 생존할 수 없다.”고 했다. 우리 몸은 약 30조 개의 세포로 구성되어 있고, 우리 몸속 세균은 약 40조 개로 세포보다 많다고 한다.
몸속 세균들은 소화, 수면, 성장, 기분, 스트레스 등에 깊이 관여한다는 연구 결과가 계속 나오고 있다. ‘오늘의 나’는 ‘세균’이 지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말까지 나온다.
몸속 세균을 모두 죽여 버리면 가장 먼저 복통과 설사가 뒤따라온다고 하니 세균은 참 곤란한 존재가 아닌가. 검은색에 삼지창을 들고 악마같이 이를 뾰족하게 기른 세균에게도 새해 복 많이 받으라고 인사를 해야 할 판이다.
세균과 나는 서로 고마운 존재가 아닌가.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말은 좋은 느낌이지만, 현실성은 매우 떨어진다는 느낌이다. 복 받으라 하기 전에 복을 줘야 하는데, 말로만 주는 복이라니 어딘가 좀 싱겁다.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도 갚으니 그 말이 누군가에겐 큰 힘이 되어줄지도 모르지만 말로만 듣기엔 허전함이 있다.
어쩌면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말에는 ‘앞으로 내가 당신에게 복을 많이 줄게’라는 뜻이 담긴 걸까? 설마? 능력이 되어야 가능하다.
복이란 게 뭘까? 돈 많이 벌기, 건강 유지하기, 사업 번창이나 승진하기, 자식 잘되기, 주변사람들 무탈하기, 맛있는 거 먹기, 좋은 곳 구경하기, 더 좋은 기회 얻기, 심지어 로또 당첨되기 등 각자에게 복은 참 다양하고 폭넓다.
이런 복을 빌어주는 건 고맙지만 작은 복이라도 누군가에게 제공하기란 쉽지 않다. “잘 되길 빌어줄게.”, “응원합니다.”랑 비슷한 종류의 말이 아닐 수 없다.
결국 잘 되기 위해 힘쓰는 건 “나”고, 응원해 주면 열심히 뛰는 것도 “나”다. 격려와 응원이 고맙고 그에 힘입어 복을 짓고, 기회를 찾고, 목표에 도달하고, 행운을 얻는 것은 궁극적으로 내 몫이다.
자기의 역량, 환경, 노력에 더하여 운도 따라 줘야 복을 받고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세상에 둘도 없는 위대한 발명품을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사회적 환경이 그에 미치지 못하면 쓸모없는 발명이 되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때 “참 복도 없다.”고 한다. 운이 따라주지 않은 탓이다. 위대한 천재들이 불행하게 살다간 경우는 더 안타깝다. 시대 상황이 천재의 역량을 받아줄 정도가 아니었던 것이다.
하물며, 우리는. 우리 보통사람들은 어떤가?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큰 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로또가 당첨되어야만 행복해질 거라는 사람도 있다.
연탄 50장만 있으면 더 바랄 게 없다는 사람이 있고, 갈라진 벽과 문틈을 종이로 바를 여유라도 있으면 좋겠다는 사람이 있다.
당신은 매달 월급이 꼬박꼬박 나오니 무슨 천운을 타고 나서 그리 복을 받고 사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 복은 얼마나 상대적인가.
상대적이라지만 절대적으로 박복한 상태에 놓인 사람들이 있다. 복을 짓는 것은 당신 자신이니 당신 책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는 복 많이 받으라고 말로 하면 그만일까? 복을 나눌 수 있을까?
연말연시가 되면 많은 사람들이 서로를 돕기 위해 작은 정성을 모으곤 한다.
공동체의 일원 중 절대적으로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에게 작은 복이라도 나누기 위해 하는 일이다.
지방뉴스 끝자락에는 복을 나누는 사람들의 성금 목록이 올라온다.
정읍 어디 마을에서 4만원, 남원에서 10만원, 김제에서 20만원, 완주에서 6만원 등 각 마을의 성의가 모아진다. 기부한 돈이 적다고 폄훼할 수 없다.
부자들의 기천만원 기부도 좋지만, 시골 할매들의 쌈짓돈 모아 보낸 돈도 소중하기는 마찬가지다. 뉴스 끝자락을 보고 있자면 마음이 따뜻해지다가 또 아려온다.
“도움 받아 마땅한 분들이 돕겠다고 저렇게 내 놓는구나.”
복이 과분한 사람들도 있다. 간장 종기만한 사람한테 호수의 물만큼 복이 주어질 때도 있다.
바다만큼 호수만큼 복이 주어져도 간장 종지, 소주잔, 앞접시 정도의 그릇엔 복을 딱 그만큼 담을 뿐이다.
자기가 취할 수 있는 양 이상의 복은 이미 자기 것이 아니다. 자기 몸보다 훨씬 큰 옷은 구럭 같은 옷일 뿐이다.
그 복을 스스로 나눌 수 있어야 누군가가 자기 간장종지에도 자꾸 복을 담아줄 것이다.
나누지 않고 흘려버린 과분한 복은 다시 주워 담으려 해도 담을 수 없다. 세월이 흘러 자기한테 밀물처럼 몰려왔던 복을 회상하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문득, 노동자에게 박하게 굴다가 초라하게 늙고 사라져간 재벌들의 얼굴, 민주주의를 압살하고 우리 이웃을 때려잡던 권력자들의 얼굴, 우리가 준 한 표 한 표를 모아 어깨에 힘주는 얼굴,
그리고 평화와 공존을 무시하고 막말을 쏟아내는 자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들의 간장종지에 담긴 복은 언제까지일까? 인간이 세균으로부터 받은 만큼이라도 나눌 수 있을까?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 그리고 좀 나눠줘라. 너희들의 그릇은 이미 가득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