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누리 뉴스레터

인권누리 웹진 제112호 회원의 붓

인권누리 2023. 5. 30. 11:17

5월의 일상

정관성



요즘 풀독으로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주말이면 밭에 나가서 일을 하고 있는데, 웃자란 풀을 뽑고 자르다 보니 팔, 다리, 목, 손, 심지어 몸에도 풀독이 올랐습니다.
요즘 밭에 나가는 재미를 붙인 아내도 풀독에 간지러워 밤잠을 설칠 정도였습니다.
긴팔, 토시, 장갑, 목수건 등으로 피부노출을 최대한 줄이려 노력하지만, 풀에 붙은 독성물질을 차단하지 못했습니다.
풀이 작을 때 제초제를 뿌렸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제초제를 최대한 자제하고 있는 터라 주말을 이용해 일하는 직장인의 입장에선 잠깐 풀을 뽑을 시간을 내지 못하면 밭은 온통 풀밭이 되어버립니다.
풀독의 원인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곤충의 탈피과정에서 발생한 섬유질, 풀이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분비하는 독성물질, 동물들의 털로 이어지는 진드기 등 다양하다고 합니다.
특히 텃밭이나 풀이 많은 곳에 야생동물이 옮겨놓은 털진드기에 물리면 쯔쯔가무시병, 중증열성혈소판감소증후군, 라임병 등에 감염되어 최악의 경우 사망에 이를 수도 있다고 합니다.
이런 정보를 접할 때면 어릴 때 풀밭에서 뛰어놀았던 생각이 납니다. 별 문제 없이 자란 건 참으로 다행이라 생각하지만 모르고 지나간 가까이 있던 위험들에 소름이 돋기도 합니다.
어떻든 풀독이나 풀벌레의 공격은 자연의 저항과 생존 방식일 뿐입니다.
그들에게 인간은 가장 악독하고 치명적인 적입니다. 저들을 죽이고 제가 당하는 풀독의 고통은 어찌 보면 응당한 대가라고 봐도 될 것 같습니다.
저들을 죽여 인간에게 유익한 작물을 키우려는 작업이 농사짓기고 그로부터 얻는 수확을 결과(結果)라고 합니다. 결과란 말은 ‘열매를 맺는다’는 뜻도 있지만 ‘어떤 원인으로 결말이 생기는 것’이란 뜻도 있습니다.
때론 결과가 좋기도 하고, 가끔은 생각지도 못한 결과가 나오기도 합니다.
열심히 뭔가를 했는데, 결과가 좋지 못하면 실망하고 상심합니다.
생각 밖으로 좋은 결과가 나오면 저절로 기분이 좋아지고 만족스럽습니다.
과정을 즐기라고, 결과에 집착하지 말라고 좋은 소리를 하는 분들에게 텃밭에서 농사를 지어보라고 하고 싶어집니다.
말로 하는 것은 쉽지만, 현실을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지금은 좀 잠잠해진 풀독이지만, 풀독으로 고생하는 시간 동안엔 “왜 텃밭은 짓나?” 하는 회의가 깊었습니다.
하지만 주말이 되면 또 풀이 자라는 텃밭에 나갈 것입니다. 지금 멈추면 그나마 요행도 바라기 어려운 때문입니다.
원인이 있어야 결과가 있고, 과정이 있어야 결과에 견주어 잘 했는지 못했는지 평가할 수 있습니다.
결과보다 과정을 즐기라는 말을 누군가에게 하는 건 신중해야 하고, 자기 자신에게 결과에 집착하지 말라고 여러 번 속으로 당부하고 다짐해도 결과가 나올 때 자신의 다짐을 올곧게 소화하고 웃어넘기는 일은 매우 힘듭니다.
풀을 한 포기 뽑으며, 흙을 한 삽 뜨며, 괭이로 흙을 깨트리며 생각합니다.
“내 마음 속의 잡초도 뽑고, 안일한 생각도 파 뒤집고, 걱정이나 근심도 깨트리자.” 일은 더뎌 지치고, 허리와 고개가 아프고, 갈증, 지루함, 막막함이 있어도 시간을 채워내고 일을 마무리하다 보면 약간의 보람이 생깁니다.
그 보람으로 만족해야하는 농사는 그야말로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사람의 일을 다 하고 하늘의 뜻을 기다린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대단한 내적 성숙이나 성취가 없어 보입니다. 어떤 사람은 농사일을 하거나 등산을 하면 머릿속이 맑아진다고 합니다.
더 복잡해지고 아무리 다짐하고 다잡아도 항상 그 자리 그 모양을 벗어나지 못하는 터라 그런 분들이 부러울 뿐입니다.
무엇보다 평생을 농사일에 매달려 고생하셨던 부모님은 무슨 생각을 하며 농사를 지으셨을까 생각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다른 농사짓는 분들은 무슨 생각으로 그 시간을 보내는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수 없이 많은 사람에게 수 없이 많은 사연들이 있겠지요.
또 그분들이 어떤 생각으로 무엇을 꿈꿨는지 안다고 해도 정작 “나” 자신에겐 별 소용도 없는 것입니다.
궁금하다가 잠시 넘겨짚다가 그만두는 상념들이 가득한 작업입니다.
그렇다면 농사는 무용한 상념에 육체를 학대하는 유용성이 없는 작업일까요? 한 가지 확실한 건 있습니다.
손발을 놀려 무엇인가를 생산하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라는 사실입니다.
생각만 하지 않고 뭔가를 직접 행동으로 옮기는 노동입니다.
노동의 결과물이 보잘 것 없다 해도 밭에 나선 행위는 기꺼이 노동에 몸을 맡기겠다는 자세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일하는 사람들의 처지를 이해하는 기본입니다. 직접 해보지 않으면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는 밭에 아들을 데리고 나가서 일하고 오실 때엔 “농사짓고 살겄냐?”고 하셨습니다.
농사가 주업은 아니지만, 그때 따라다니며 거들던 농사일을 주말에 하며 살고 있습니다.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뭔가 대단한 것을 얻지 못합니다. 다만, 그때의 아버지 심정을, 이웃의 농민의 심정을, 대대로 내려온 조상들의 심정 아주 조금이나마 느끼고 살기로 합니다.
노동의 소중함을 책이나 말이 아니라 몸으로 배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