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선 교사의 인권이야기
한 사람의 거부의 몸짓이 세상을 바꾼다.
한 때 교원노조 전임자로 일을 할 때 많게는 십 여 통의 민원과 문의전화를 받곤 했다. 단순한 법적 질문부터 시작해서 심각한 인권침해 도움요청까지.
얼굴도 잘 모르는 네게 전화해서 상담을 요청할 정도면 고민에 고민을 하다가 어렵사리 전화를 한 것이다.
수화기 너머에서 처음에 주저하던 목소리는 시간이 흐르면서 감정 선이 격해지고 자신이 당한 억울한 일에 대한 하소연으로 이어진다. 심지어 울며 전화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이다. 대개 통화는 한 시간을 넘어간다.
통화만으로는 도저히 힘들 것 같아서 노조 사무실로 방문을 요청하면 다시 주저한다. 이런 일에 도움을 주고 교사의 억울함을 함께 해결하기 위한 단체임에도 불구하고 노조는 무서운 곳이라는 이미지 덧칠 때문인지 전화를 거는 용기와는 또 다르게 노조사무실 방문은 어려워들 한다.
그럼 제가 학교로 방문하는 것은 어떠냐는 제안에는 화들짝 놀라며 그러지 말고 근처 조용한 커피숍에서 보자고 제안하기도 한다.
우여곡절 끝에 만나기로 한다. 수인사를 나누고 차분히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래도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 하니 조금은 차분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내 울컥해지고 급기야 말을 잇지 못하고 다시 눈물을 보이는 경우도 많다. 교직의 특성상 여자 교사가 많다보니 상담자도 여성인 경우가 많고,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커피숍에서 여자는 울고 있고 남자는 조용히 듣고 있는 모습의 그림은 여러 가지 상상을 하게 만들기에 충분하고 난감할 때도 많이 있다.
결국 이야기를 다 들은 후에, 그가 당한 억울함은 충분히 부당하며 교사의 권리와 권한을 침해하는 행위이고 심지어 가해자에게 징계를 요청할 수 있는 사안이라고 설명한 뒤, 해결 방법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한다.
자신의 억울함과 부당함을 공감해주는 것에 감사해하는 표정을 짓고 누군가에게 속 시원히 털어놓았다는 후렴함도 잠시, 이 대목에서 다시 주저함이 찾아온다. 그러다가 며칠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하고 그날의 자리는 마무리한다.
아쉽지만 대개 거기까지가 끝인 경우가 많다.
노조전임자를 끝내고 학교로 돌아왔지만 하던 일의 연장선인지 요즘도 하루에 몇 통의 전화와 메신져를 받곤 한다.
비슷한 패턴의 반복이다.
경험적으로 열통의 전화 중 대략 다섯 통은
‘선생님. 너무 아프고 억울하시겠어요. 선생님께서 원하시면 도움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실례지만 어느 학교 누구신지요?’라고 물으면
주저하더니 “선생님 죄송합니다. 조금 더 생각해보고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하고 전화가 끊어진다.
그리고 대개 그 전화가 마지막이다.
그저 억울함에 대해 공감해주고 법적인 내용과 대응방법을 알려 준 것으로 충분하지 뭐~ 라고 자기 위로를 해보지만 씁쓸하다. 그 선생님은 계속 비슷한 억울함과 부당함을 당하고 지낼테고 그저 자기가 속으로 삭히고 말 것이 예상되는 까닭이다.
남은 열통의 전화 중 두 세통은 그래도 그보다 한발 더 나간다. 자기의 이름과 학교를 밝히며 이야기가 이어지고 조언과 상담은 계속된다.
‘선생님. 이 문제는 선생님 혼자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로 보입니다. 교원노조가 개입하거나, 교육청에 민원을 넣거나, 인권침해로 감사를 요청해야 할 사안으로 보입니다. 동의하시면 선생님 문제를 학교 담 밖으로 가져와야 해결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갑자기 일이 커질 수 있다는 불안감에 주저하는 모습이 수화기 너머로 보이는 듯하다. 그리고는 “ 조언과 도움 감사하고 일단 가족이나 지인과 상의해보고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라는 답이 이어진다.
그리고 이후 간간이 이어지는 궁금한 점에 대한 질문과 법적인 내용, 이후 예상되는 상황에 대해 문의가 몇 번 오가지만 자신이 받은 (심각한)인권침해에 대한 해결 보다는, 누군가에게 책임을 묻고 가해자에게 또 다른 피해(?)를 주는 것이 잘하는 것인지에 대한 인간적인 망설임을 반복하다가 대개 그만두곤 한다.
그래도 전체 전화나 상담 열개 중 한 두건은 절차대로 진행해서 피해자의 억울함과 부당함을 해결하고 다시 제자리로 돌려지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문제는 상담한 열 건 모두 엄중하고 힘듦의 크기가 대동소이하다는 것이다.
간단하고 처리가 비교적 쉬운 문제였다면 노조에 도움을 요청하거나, 얼굴도 잘 모르는 사람에게 전화해서 상담을 요청하지조차 않았을 게다.
하지만 상담의 결과는 매우 큰 격차를 나타내고 있다.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흑인인권운동의 어머니 로자 파크스에 관한 일화는 한 사람의 거부의 몸짓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1955년 12월 1일 목요일, 흑인들에게는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 날이라고 하면 과언일까?
흑인인종분리법이 시행되고 있던 미국 몽고메리시에서는 작은 소동이 일어났다. 흑인여성인 로자 파크스가 버스에서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할 것을 거부한 것이다.
몽고메리 페어 백화점에서 판매원으로 일하던 로자는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일을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요금을 내고 유색칸으로 표시된 좌석들 중 가장 첫 줄의 빈자리에 앉았지만 버스가 정류장을 지나칠 때마다 승객들이 탔고, 금세 만석이 되었다. 버스운전사는 로자에게 자리에서 일어날 것을 요구했지만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경찰을 부르겠다는 운전사의 협박에 로자는 “마음대로 하세요.”라며 차분하게 맞섰고 곧 경찰이 출동해 그녀를 체포했다. 흑인이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이 법으로 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남북전쟁으로 노예해방은 이루어졌지만, 미국에서는 인종차별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1896년 미국연방대법원은 ‘평등하되 분리한다.’는 교묘한 판결로 사실상 백인과 흑인의 차별을 허용하고 있었다. 물을 마시는 급수대도 백인과 흑인이 나누어져 있었으며, 백인 전용 식당, 학교, 수영장, 화장실, 버스 좌석 등 생활 전반에서 인종차별이 팽배했다.
로자의 체포소식이 알려지자 그 유명한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로자의 재판일인 12월 15일에 버스 보이콧에 동참하자는 전단지가 배포되었고, 버스 보이콧이 진행된 날 아침 몽고메리시 버스는 승객 없이 달리고 있었다. 흑인들은 로자에게 힘을 싣고, 인종차별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먼 길을 걸어가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버스 보이콧에는 마틴 루터 킹 목사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흑인이 참여하였다. 비록 로자는 유죄가 선고되어 벌금을 내고 풀려나야 했지만, 그녀의 작은 행동 하나가 불씨가 되어 흑인사회를 변화시킨 촉매제가 된 것이다. 1년 이상 지속된 버스 보이콧의 결과 1956년 11월 미국 연방대법원에서는 흑인과 백인을 나누어 버스좌석을 차별하는 인종분리법이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린 것이다. 그 후 흑인들의 시민권 운동은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으로 번져 나갔다.
상담과 조언을 구하는 교사들에게 내가 아는 한, 할 수 있는 한 도움을 드리지만 대개 거기까지다.
결과적으로 상담한 대다수는 그저 개인이 삭히고 만다.
너무 힘드니 얼굴도 잘 모르는 내게 전화까지 했건만,
문제를 공론화 하는 것에 주저하거나 스스로 포기하고 마는 것이다.
권리를 아는 것과 권리를 행사하는 것은 다르다.
문제는 자력화(empower)다.
“권리 위에 잠자는 자는 보호를 받지 못한다.”
-루돌프 본 예링(독일 법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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