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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의 인권 역사 문화 유적지(126) |
이번호의 인권역사문화유적지는 장수향교 입니다. 위치는 전북 장수군 장수읍 향교길 31-14 (장수리 254-1)번지에 있습니다.
1407년(태종 7)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配享)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장수면 선창리에 창건하였습니다. 1686년(숙종 12)에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고, 1877년(고종 14)에 현감 홍우정(洪佑鼎)이 중수하였으며, 1935년에 중수하고 1970년·1973년·1975년에 각각 보수하였습니다. 이 향교는 임진왜란 때에도 훼손되지 않고 보존되어 조선 전기 향교의 형태를 잘 알 수 있습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성전·명륜당·동재(東齋)·서재(西齋)·사마재(司馬齋)·양사재(養士齋)·고사(庫舍)·부강문(扶綱門)·정충복비각(丁忠僕碑閣) 등이 있습니다. 건축형태는 명륜당이 앞에 있고, 대성전이 뒤에 있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입니다. 강학공간은 강당이 앞에 있고, 재사가 뒤에 있는 전당후재(前堂後齋)의 배치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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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전은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으며, 조선시대 향교 건축의 대표적 건물의 하나로 보존되고 있습니다. 그 구조는 낮은 석축 기단 위에 세운 맞배집으로 정면 3칸, 측면 4칸으로 되어 있으며, 5성(五聖), 송조 4현(宋朝四賢),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습니다. 정충복비는 1985년 전라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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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향교의 특징은 원노(院奴)인 정충복비가 세워져 있는 것입니다. 임진왜란 때 왜장 고바야가와[小早川隆景]의 부장 안코쿠시[安國寺惠瓊]가 장수지역에 침입하였을 때, 원노인 정경손(丁敬孫)이 교복을 입고 문묘 앞에 꿇어앉아 경서를 외우며 말하기를, “만약 향교에 들어오려거든 먼저 내 목을 베고 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왜군들도 그의 기개에 감복하여 ‘본성역물범(本聖域勿犯)’이라는 쪽지를 주고 물러가 왜군 후속부대의 피해를 당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임진왜란 때 전라도를 비롯한 대부분의 향교가 거의 소실되었으나 오직 장수향교만 전화를 입지 않고 보존된 것은 정경손의 공로였습니다. 그리하여 후인들이 그의 의행(義行)을 기리기 위하여 향교 문전에 의거비를 세우게 되었는데, 이 비는 장수의 삼절(三絶)로 이름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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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 삼절은 순의리 백씨, 주논개, 그리고 정경손을 말합니다. 순의리 백씨는 1678년 장수 현감이 민정시찰 중 말과 함께 떨어져 죽자 바위벽에 ‘타루(墮淚: 눈물을 흘리다)’라는 두 글자를 쓴 후 스스로 몸을 던져 순절한 인물이며, 의암 주논개는 진주 남강에서 왜군의 공성장 모곡촌육조의 허리를 안고 물에 떨어져 순절한 인물입니다. 충신, 효자, 열녀의 고장 장수에서는 매년 음력 3월 22일 장수문화원 주관으로 장수 삼절에 대한 제례 봉행을 거행해 오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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