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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의 인권역사문화유적지(173) |
이번호의 인권역사문화유적지는 진안 전동흘 장군묘입니다. 위치는 전북특별자치도 진안군 성수면 신기리 산48-3번지에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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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동흘 장군(1610~1705)은 진안 가림리 출생으로 1651년에 42세의 나이로 병과에 급제했으며 전주의 이상진, 익산의 소두산과 함께 호남삼걸로 불렸습니다. 전동흘 장군과 관련된 진안군 내 문화유산으로는 전동흘장군 묘, 광국재, 신도비, 이산묘 등 4개소가 있으며, 전동흘 장군 신도비는 2021년 진안군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됐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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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군 진안읍 가림리 일대는 장화홍련전과 깊은 관계가 있다. 장화홍련전의 무대는 평안도 철산이지만 전동흘 장군이 태어나고 성장한 곳이 바로 가림리 일대이기 때문입니다. "광국장군전동흘실기"에는 전동흘의 탄생에 대해 그의 어머니가 50이 넘도록 자식을 얻지 못하다가 한 시주승의 권고로 마이산에 정성을 들여 잉태하고 광해군 2년에 가림촌 한모퉁이 오막살이집에서 태어났다고 쓰여 있습니다. 은천마을은 천안 전(全)씨의 집성촌으로 조선초기 원가림마을에 살던 전대승(全大昇)라는 사람이 이곳에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했으며 후에 최씨와 박씨 등이 함께 살면서 마을을 이뤘다고 합니다. 일설에는 전동흘이 출생지를 가림리 탄곡마을로 지목하고 있으나 바로 대승이라는 인물은 전동흘의 아버지로 은천마을이 어린시절 전동흘의 성장지였던 것은 분명합니다. 전동흘은 고려 문종왕때 천안부원군 충민공 전락(全樂)의 원손으로 조선초기 호조판서를 지낸 대호군 전극례(全克禮)의 6대손이며 어렸을 적부터 성격이 대담하고 무예가 출중했다고 합니다. 인조 2년에 서울에 올라가 월사 이정구의 문하에서 공부를 하다가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15세의 나이로 지원병으로 출전했으며 인조 5년 정묘호란에 부친이 순절하자 고향에 안장하고 3년간 시묘하고 한때 고향에 머물렀습니다. 1636년에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남한산성 싸움에서 용맹을 떨쳤으며 삼전도 굴욕후 동궁과 봉림대군이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가자 배종무관으로 동행, 청나라의 각종 정보를 파악해 조선의 군사전략 수립에 공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귀국해서는 조정에서 내린 벼슬을 사양하고 낙향했다가 효종이 등극하자 우암 송시열의 추천으로 40세가 되어서야 선전관 내삼청과 흥덕현감이 되었고 강원, 충청, 황해병사를 거쳐 포도대장과 훈련대장, 오위도총관까지 지냈습니다. 전동흘은 96세의 나이로 숙종 31년(1705년)에 세상을 떠났으며 임금이 관리를 파견해 조문하고 지사(地師)를 보내 묘택을 잡아 장사를 지낼 정도로 애석해 했다고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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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화홍련전은 전동흘이 철산부사로 재직하던 시절의 이야기로 "광국장군전동흘실기" 제6회부터 제9회까지로 구성돼 있습니다. 강선여향화입몽 혹후처가서성태(降僊女香花入夢 惑後妻假鼠成胎; 선녀가 내려오니 향기로운 꽃에 현몽하고 후처에 혹하니 쥐를 잡아 태라하도다)로 시작되는 장화홍련전의 이야기는 부임하는 철산부사들마다 원인도 모르게 횡사하자 전동흘이 철산부사를 자원해 장화와 홍련의 원혼을 풀어주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 같은 전동흘의 이야기는 진안읍 가림대 일대에 살고 있는 후손들에 의해 전해오고 있으며 은천마을에서 마주 보이는 숯실산, 탄곡마을 입구 좌측 산기슭에 그의 선친(대승)과 조부(수감), 증조부(규)의 묘소가 자리하고 있어 전동흘의 일화와 흔적을 확인시켜주고 있습니다. 특히 숯실산 묘택은 전동흘 장군을 만들어낸 명당으로 유명하며 이와 관련된 일화가 전해 내려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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