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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해질 결심 |
정관성(원광대 강사)
겸손해질 결심
이틀 전 밤새 굉장한 폭우가 쏟아졌습니다. 군산 어청도에는 시간당 146mm의 비가 내렸다고 합니다. 어림잡아 한 시간에 15cm 정도의 비가 내린 것이니, 이는 거의 양수기로 논에 물을 대는 것보다 많은 비가 내린 것입니다.
폭우가 내리기 전날 직원이 제게 물었습니다. “팀장님, 내일 오전 11시 회의 제 시간에 오실 수 있을까요?” 통상적인 일정 체크였고, “지진이 일어나지 않으면 맞춰서 가지 않겠어요?”라며 농담처럼 대답했습니다. 얼마 전 용산역에서 회의를 하려고 가는 중 부안에서 지진이 일어나 KTX가 서행하면서 회의에 30분 늦었던 일을 비유했던 것입니다. 출장 당일 전북혁신도시에서 버스로 익산역까지 이동해야 하는데, 직행 버스가 오지 않았습니다. 버스가 10분 정도 늦게 오면서 기사님은 “비가 와서 승용차가 너무 많이 나와 길이 막혀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를 연발했습니다. 아직 기차시간이 충분해서 괜찮다고 대답하고 앉아 있는데, 평소보다 직행버스는 늦게 갔고, 겨우 예약한 기차시간 5분을 남겨 놓고 익산역에 도착했습니다.
익산역에 도착하여 기차를 타러 가는데, 어제의 직원이 다시 연락을 해 왔습니다. 기차가 연착하여 최대한 빠른 기차로 다시 예약하고 기다린다는 것이었습니다. 8시 48분차를 타려고 플랫폼에 내려가 보니 46분 연착한다는 안내 방송이 나왔습니다. 다시 역사로 올라가 역무원에게 묻고 가장 빠른 기차로 변경하는데, 8시 50분 현재 남원을 출발해서 전주역으로 향하는 기차가 가장 빠른 기차며, 원래는 익산역 6시 36분 기차라고 했습니다. 두 시간 넘게 연착하는 것이지만, 그게 앞차니 뒷차와 바꾸는 게 좋겠다고 해서 바꾸고 기다려서 결국 9시 30분 경에 기차에 탔습니다. 무려 3시간 가까이 연착한 기차를 탄 것입니다. 11시로 예정되었던 회의에 10분 정도 늦었지만, 회의 참석자들은 걱정하며 기다렸다고 합니다. 오늘 출장비를 정산하기 위해 코레일 홈페이지에서 영수증을 찾아보는데, 반환차표라고 하여 요금을 받지 않았습니다. 연착한 코레일의 책임으로 승객에게 요금을 받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코레일의 손해도 만만찮을 것입니다. 기차가 익산을 지나 강경을 향하는 중에 호수가 되어버린 들판을 동영상으로 찍었습니다. 빠르게 달리는 KTX의 속도에도 불구하고 약 20초 동안 창밖엔 흙탕물 호수로 변한 논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참혹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농부들의 피눈물이 제 눈에 아른거렸습니다.
지난 토요일과 일요일엔 밭에 들깨모를 심었습니다. 토요일엔 비가 오지 않았지만, 일요일엔 오전부터 비가 왔습니다. 직장을 다니며 농사짓는 터라 일요일에 심지 않으면 또 일주일을 미뤄야 하고, “들깨는 비 맞으며 심는 것”이란 말도 있고 해서 비를 흠뻑 맞으며 들깨를 심었습니다. 트랙터나 관리기로 갈지 못한 밭에서 풀을 뽑아가며 들깨를 심자니 여간 고역이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모처럼 작정하고 비를 맞으니 후련한 기분도 들었습니다. 다리와 팔엔 피부트러블이 생겼고, 손톱은 멍이 들 정도로 노동 강도는 강했습니다. 비에 젖은 옷이 체온으로 마르다 비가 오면 젖는 통에 몸에선 역한 냄새가 났습니다. 그리 고생하고 심은 들깨가 어떻게 되었는지 아직 확인해 보지 못했습니다. 잘 살아 있길 바랄 뿐입니다.
언론과 전문가들은 앞으로 더 나빠지면 나빠졌지 좋아질 거 같지 않다고 합니다. 기후 위기는 이미 시작되어 진행형이 되었다고 합니다. 인간이 저지른 행동의 결과가 인간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한쪽이 비와 바람에 휩쓸리면 한쪽은 고온에 산불이 번집니다. 지구 곳곳이 몸살을 앓습니다. 현재의 상태를 어떤 이는 “지구의 위기가 아니라 인간종의 위기이며, 지구는 다시 인간종을 멸하고 나서 자기 균형을 찾을 것”이라고 하더군요. 생각해 보면 아주 짧은 기간 인간이 지구와 이웃 생명들에게 끼친 해악이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컸습니다.
버스가 익산으로 들어서기 전 만경강을 지나는 다리에서 본 것은 인간 문명의 추한 찌꺼기들이었습니다. 흙탕물 위로 온갖 플라스틱과 스티로폼 등이 가득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지진, 해일, 홍수, 가뭄, 산불, 태풍 자연은 인간의 하찮은 능력에 비해 위대하고 거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을 부추기고 화나게 한 자들은 아직도 겸손할 줄 모릅니다. 천재지변이 일상이 되는 상황에서 이제 인간종 누구도 안전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겸손해질 결심이 필요한 때입니다. 더 낮은 자세로 자연의 노여움 앞에서 그간의 무례와 파렴치함을 반성해야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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