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전북의 인권역사문화유적지(237) |
이번호의 인권역사문화유적지는 장수 백장선생 유적입니다. 위치는 전북특별자치도 장수군 장계면 장무로 495-14번지에 있습니다.
백장선생 유적(白丈先生 遺蹟)은 대한민국 전북특별자치도 장수군 장계면 금덕리에 있는 고려시대의 백장선생 유적입니다. 1999년 4월 23일 전북특별자치도의 기념물 제101호로 지정되었습니다. |
 |
백장(白莊)은 1342년(고려 충혜왕 4)∼1415년(태종 15)의 사람으로 고려 후기 충신입니다. 자는 명윤(明允)이고, 호는 정신재(靜愼齋)입니다. 본관은 수원(水原)입니다.
백장은 천성이 순수하고 착하였으며, 어려서부터 배우기를 좋아하였는데, 특히 역리(易理)를 탐구하는 것을 좋아하였습니다. 자라서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경학(經學)과 성리학(性理學) 등을 배우며 훗날 치국경세(治國經世)의 기량과 지조를 지키는 절개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목은(牧隱) 이색(李穡), 야은(冶隱) 길재(吉再), 그리고 스승 정몽주를 포함한 삼은(三隱)에 버금가는 성리학자가 되었습니다. |
 |
16세 되던 해인 1357년(공민왕 6)에 성균관(成均館)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습니다. 이후 원나라로 유학을 떠나, 25세의 나이로 원나라 과거에서 장원(壯元) 급제하는 등, 자신의 기량과 경륜을 넓혔습니다. 원나라에서는 그에게 한림시독학사(翰林侍讀學士)의 관직을 내려 머물게 하려고 하였으나, 귀국하여 광정대부(匡靖大夫) 이부전서(吏部典書) 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 등 요직을 역임하였습니다. 그러나 무신 이성계의 반란으로 고려가 멸망하자 개경(開京)을 떠나 강원도 원주(原州) 치악산(雉岳山)으로 들어갔는데, 이때 그의 명성을 듣고 찾아든 선비들이 구름같이 많았다고 합니다. 태조 이성계는 그의 학식과 덕망을 높이 사 집현전대제학(集賢殿大提學)을 제수(除授)하였으나, 이를 거절하여 충청남도 서산군(瑞山郡) 해미(海美)로 유배를 가게 되었습니다. 그 후 태종은 다시 이조판서(吏曹判書) 집현전대제학(集賢殿大提學) 등을 제수(除授)하며 그를 회유하였으나, 이 또한 거절하여 전라북도 장수현(長水縣) 임현내면(任縣內面) 호덕동(虎德洞) 위동(位洞)으로 유배되었습니다. |
 |
그는 장수현 장계(長溪)의 남쪽 유천(柳川) 언덕 위에 청심정(淸心亭)을 짓고, 학문 연마와 후학 양성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당시 방촌 황희(黃喜)도 그곳으로 유배를 왔었는데 조석으로 그에게 문안 인사를 드릴 만큼, 그는 존경받는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태종은 ‘동방의 백이(伯夷)’라며 의정부영의정 겸 영중추부사(議政府領議政兼領中樞府事) 및 이부전서 보문각대제학(吏部典書寶文閣大提學)을 추증(追贈)하고 예관을 보내 제사를 지내게 하였습니다. 묘소는 전라북도 장수현 호덕동 뒤편 양지바른 언덕에 자리하고 있으며, 백충신묘(白忠臣墓)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인근에 신도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그는 원주(原州)의 죽림서원(竹林書院)에 배향되었는데, 서원은 상덕사(尙德祠)로 사액되었습니다. 1828년(순조 28)에는 장흥 유림들이 월강서원(月岡書院)을 창건하고 그를 배향하였으나,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으며, 1948년에 다시 복원하여 배향하고 있습니다. 시호는 문경공(文景公)입니다.
방장 선생은 충신 불사이군(忠臣 不事二君)의 절개(節槪)를 지닌 고려시대의 충신입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