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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접을 배우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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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성(원광대 강사)
9월 22일부터 11월 10일까지 한국폴리텍대학교 전북캠퍼스에서 실시하는 “신중년특화과정”으로 설비보전 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국가에서 전액 무료로 지원하는 만 40세 이상이면 누구나 신청할 수 있는 과정입니다. 우연히 김제에서 전주로 오던 길에 현수막 홍보물을 보게 되어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90년대 초반 “파업전야”라는 16mm 독립영화가 있었습니다. 장산곶매라는 영화제작사에서 만들었고, 각 학교에서 상영하기 위해 경찰과 싸워야 했습니다. 정작 영화를 본 건 한참 후였습니다. 영화 상영만 한다고 하면 경찰이 학교에 밀고 들어오던 시절이었습니다.
“파업전야”의 주제곡이 “철의 노동자”였습니다. 집회와 뒤풀이 등에서 철의 노동자 노래를 부르며, 스스로 철의 노동자가 되기로 다짐하곤 했습니다. 노동운동이 활발하던 시절이었고, 학생들은 노동운동의 지원자이자 예비 노동자라는 생각으로 이런저런 활동에 참여하곤 했습니다. 스패너를 들고, 용접봉을 녹이며, 프레스에 눌린 쇠붙이를 반복하여 넣고 꺼내는 일을 하겠노라고 생각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노동의 소중함과 노동자의 신뢰와 연대로 억압과 착취가 사라지는 세상을 꿈꿨습니다. 학교 수업과 일상생활은 모두 하나의 목적 아래에서 부차적인 문제로 치부되곤 했습니다.
이래저래 군대에 갔다 오고, 다시 복학생이 되어 후배들과 집회에 나가고, 환경과 문화의 문제점에 대해 논의하면서, “철의 노동자”가 되겠다던 다짐은 서서히 다른 방식의 삶으로 대체되었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그야말로 호구지책으로 벌어먹고 사는 일에 푹 빠져 살았습니다. 쇠를 다루고 몸을 움직이는 직업이 아닌 사무실에서 자판을 두드리거나 회의를 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올 봄 텃밭에 작은 창고를 짓겠다고, 재료를 끌어 모았습니다. 그 중에는 장인어른이 보관하고 있던 강관도 있었습니다. 직경이 약 49mm에 가까운 강관으로 공사장 비계 설치용이었습니다. 강관을 잘라 카니발 차량에 싣고 와서 용접을 한답시고 용접기를 장만했지만, 초보자의 손길을 알아보는지 겉으론 붙어 보이던 쇠붙이들은 똑똑 떨어졌고, 일부는 구멍이 숭숭 뚫렸습니다. 다른 방법은 드릴로 구멍을 파고, 꺾쇠로 연결할 생각이었죠. 이번에는 드릴날이 똑똑 부러졌습니다. 어찌어찌 찾다가 용접하지 않고 끼우는 연결 이음쇠 클램프라는 것을 구매하여 작은 창고 골격을 갖췄습니다. 물론 이도 쉽지 않았지만, 쇠붙이를 가지고 뭘 한다는 것의 어려움과 비전문성으로 고생했던 기억이 납니다. 처참한 패배 후의 무승부 정도라고 할까요.
폴리텍대 교육과정에는 용접, 배관, 냉동공조, AI기초 등이 있습니다. 교육생 중에 사무직은 딱 한 명입니다. 다른 교육생들은 농업, 축산업, 스마트팜, 공장 노동자 출신 등 다양합니다. 그들은 정확한 용어는 모르지만, 공사장에서 쓰는 용어와 공장 등에서 사용하는 일본어가 섞인 용어에 익숙합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달려든 제게 뭐 하러 여기에 왔냐고 묻는 분도 있습니다. “작은 텃밭을 하면서 필요해서요.” 대답하면, “그건 그냥 전문가 돈 주고 데려다 쓰면 될 것인디~~”라며 혀를 끌끌 찹니다. 악의 없는 대화에 웃곤 하지만, 여러 생각이 듭니다.
“한 때는 나도 공장 노동자를 꿈꿨다. ”는 말은 차마 입에서 떨어지지 않습니다. 이미 제가 살아가는 존재 방식은 공장에서 노동자를 조직하여 파업과 투쟁으로 단련되는 그런 삶의 방식과 멀어진 탓입니다. 소위 말하는 학생 출신의 헌신적인 노동운동가는 아닌 것입니다. 물론 회사에서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노조위원장 경험도 있습니다. 그래도 제가 인정할 정도는 아닙니다. 쇳가루를 만지든, 펜을 잡든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옹호하고 불의에 저항하는 것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해도 오래전 가졌던 생각들 앞에선 부끄러워지고 숙연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하물며 어찌 공장 노동자를 꿈꿨다는 말을 할 수 있을까요. 가끔 누군가를 연대한다는 취지의 성금을 보내고, 가끔 예전에 같이 활동하다 아픈 누구누구에게 병원비를 보태는 정도로는 쉽게 말하기 어려운 것들이 있다고 생각하는 탓입니다. 무엇보다 상대방이 “그래서 뭐 어떻다는 거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다는 점도 이유에 들긴 합니다. 더 심한 경우 “넌 처음부터 꿈꾼 게 아니고, 허세였을 거야.”라고 말한다면 무안함을 넘어 더 깊이 상처받을 수 있어서 꼭꼭 숨겨두는 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난 주말엔 긴 연휴의 끝에 밭에 나가 풀을 정리한다며, 낫을 열심히 갈았습니다. 잘 드는 낫에 손가락을 깊이 베었습니다. 급하게 응급처치하고, 비닐과 노끈으로 동여매고 나머지 일을 다 하고 집에 왔습니다. 집에서 지혈하고, 소독하고, 치료했지만, 위치가 자꾸 벌어질 위치인지라 병원에 가서 다섯 바늘 꿰맸습니다. 붉은 피를 보면서, 낫에 깊이 상처 입고 나서, “내가 지금 뭘 하는가?”를 생각했습니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현재의 일상일 뿐입니다. 여기서 갑자기 “피 끓는 동학농민의 후예니 뭐니” 하는 건 우스운 일입니다. 아까 말했던 “철의 노동자”가 아닌 것과 같습니다. 그저 일상의 어느 시점에 나름 노력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족할 거 같습니다.
말로 했던 것, 그것을 표현하고 어찌어찌 하겠다고 했던 것들이 부끄러워지는 시절입니다. 오래전 다짐들은 순수했다고 할지 몰라도 지금은 금이 가 있습니다. 금을 내보일 필요도 더 벌릴 필요도 없습니다. 하지만 용접을 배워 엉성하게라도 쇠붙이를 이어 붙이듯 깨진 금과 벌어진 틈을 매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대단한 선언이나 다짐의 몸짓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웃과 일상과 가족과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들이 용접봉이 되길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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