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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북의 인권역사문화유적지(238) |
이번호의 인권역사문화유적지는 진안 죽도 정여립선생 유적입니다. 위치는 전북특별자치도 진안군 진안읍 가막리 산 6번지에 있습니다. 진안 죽도는 정여립 선생이 학문과 사상을 펼쳤던 상징적인 공간으로, 대동정신의 뿌리가 서린 곳"입니다. 정여립이 꿈꾼 '백성이 주인이 되는 세상'은 오늘 우리가 되찾아야 할 인권 정신입니다. 정여립은 조선 중기의 사상가이자 개혁가로 벼슬을 버리고 전북 전주, 완주·진안 일대에서 활동하며 제자들과 함께 대동사상을 펼쳤습니다. 그는 신분제 사회의 모순을 비판하고 모두가 평등한 사회를 주장한 조선의 대표적 혁명사상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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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도는 조선시대 정여립이 죽은 곳으로 이름만 섬이었으나, 이후 진짜 섬이 되었습니다. 진안 죽도가 있는 산이 천반산입니다. 높이는 647m, 하늘 천天, 소반 반盤자를 이름으로 씁니다. 조선시대에는 천방산天防山·天方山이라 불렸다고 합니다. 천방산이 시간이 흐르면서 천반산으로 바뀐 셈입니다. 천반산의 큰 형님은 덕유산입니다. 덕유산 향적봉에서 흘러내린 물줄기가 구량천이 되고, 구량천이 'ㄷ' 모양으로 천반산을 끼고 흘러가서 금강을 만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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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선조 때 정여립은 천반산과 죽도와 인연을 맺습니다. 전주에 살던 정여립은 어릴 적부터 천반산에 놀러 와서 책도 읽고 활도 쏘곤 했습니다. 정여립은 영리하고, 사람을 사로잡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가 입을 열면 사람들이 탄복했습니다. 어른이 되더니 과거에 급제해 벼슬에 올라 한양에서 승승장구하는가 싶더니, 임금의 미움을 사서 벼슬을 잃고 죽도로 돌아왔습니다. 이윽고 대동계(大同契)라는 단체를 만들어서 천반산에 산성을 만들어서 머물렀습니다. 수백 명이 머물면서 군사 훈련을 하고, 손죽도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반란을 준비한다는 역모 혐의에 휘말려 죽도(竹島)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천반산 앞에 솟은 호리병처럼 뻗은 땅은 강이 휘감아 돌고 있는데 육지의 섬 같다고 해서 죽도라는 이름이 생겼습니다. 하늘에서 본 죽도관문은 건너편 고산(876m) 산줄기에서 강가로 접근하는 산길이나 임도가 없어, 죽도관문에 올라서야만 볼 수 있는 풍경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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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립이 죽고, 그 여파로 연이은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기축옥사(己丑獄事)로 인해 서인(西人)과 동인(東人)으로 정치권의 파가 나뉘어 있었는데, 정여립이 죽은 걸 시작으로 대동계에 가담한 이들을 포함해서 동인 1,000여 명이 처형되거나 유배되었습니다. 역사는 그를 역적으로 기억하지만, 천하공물론(天下公物論)을 주장한 것이 죽을 죄의 씨앗이었습니다. "천하는 공물(公物)이니, 어찌 주인이 따로 있으리요" 라는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진안의 죽도는 깎아 세운 듯한 바위산 절벽을 맑은 물이 한 바퀴 휘돌아 흐르고 있기에 마치 섬과 같은 곳입니다. 산 대나무가 많고 그 앞에 천반산이 죽순처럼 솟았다 해서 죽도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행정 구역상으로 진안읍 가막리에 속하는 이곳은 장수와 장계에서 내려오는 춘천과 무주군 안성면에서 동향면을 거쳐 흘러오는 구량천이 합수하여 Ω 모양으로 휘감아 돕니다. 게다가 육지로 이어지는 곳은 사람의 출입이 불가능한 길입니다. 죽도와 육지가 이어지는 지역에는 날카로운 바위가 있는데, 지역 주민들은 그 모양이 병풍 같다고 하여 병풍바위로 부르거나, 닭의 볏을 닮았다 하여 베슬 바위라고 불렀습니다. 이곳은 조선 선조 때의 문신인 정여립이 한때 은신했다는 죽도서당이 있었던 곳입니다. 근방의 천반산에는 정여립이 군사를 조련하였다는 전설이 있는 산성터가 있어 죽도와 함께 연계 관광이 가능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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