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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인가, 언어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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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야(전북불교대학 학장)
조사의 마음과 부처의 입은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
동일한 언어라도 어떤 상황에서 쓰였냐에 따라 맥락과 의미가 다르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냉커피를 마시고 ‘시원하다. ’라고 말하는 것과 뜨거운 해장국을 먹고 ‘시원하다’라고 말하는 것은 의미가 완전히 다르다. 이러한 차이를 인식하지 못하면 살면서 적지 않은 문제와 직면할 수 있다. 아침에 만난 이웃에게 ‘식사하셨어요?’ 하는 말은 정말로 밥을 먹었냐는 뜻이 아니라 밤새 별일 없었느냐는 안부 인사다. 만약 상대가 ‘아니요. 안 먹었는데요.’라고 답하면 질문한 사람이 뻘쭘해진다. 요즘엔 ‘좋은 아침!’ 이렇게 인사하기도 하는데, 기성세대에겐 왠지 낯설고 정겨운 느낌이 나지 않는다.
마음과 달리 말이 헛나와서 일을 그르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친구에게 지난 일을 사과하려고 만났는데, ‘미안하다. ’라는 말 대신 입에서 다른 소리가 튀어나와 관계가 더 멀어지기도 한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이미 입으로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는 일이다.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으면 좋겠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이던가. 마음과 언어 사이의 간극을 줄이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불교에서 마음과 언어를 대표하는 종파가 바로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경전을 통해 전승되었다는 것이 교종의 입장이다. 반면 선종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졌다고 주장한다. 흔히 말하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이 그것이다. 선(禪)의 사구게(四句偈)로 알려진 ‘교외별전(敎外別傳) 불립문자(不立文字)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 역시 문자가 아니라 마음을 보고 성불한다는 입장을 강조한 것이다.
이처럼 선종과 교종은 자신만의 정체성을 드러내면서 적지 않은 대립과 갈등을 일으켰다. 지눌이 살던 고려 중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기록에 의하면 이 둘이 ‘원수처럼’ 싸웠다고 전한다. 같은 불교 내에서 마음과 언어가 통하지 않아 서로 원수처럼 싸운다는 것이 도대체 말이 되는 상황인가? 당시 지눌이 느낀 문제의식이었다. 그는 이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하가산(下柯山) 보문사(普門寺)에서 3년 동안 대장경을 치열하게 연구한다. 당시 교외별전의 전통을 계승한 선사로서 이는 파격적인 행보였다. 그리고 마침내 선(禪)과 교(敎)가 둘이 아니라는 근거를 찾고 사자후를 외친다.
“조사가 마음으로 전한 것이 선이요, 부처가 입으로 말한 것이 교다. 조사의 마음과 부처의 입은 서로 어긋나지 않은데, 어찌 근원을 찾지 않고 자기가 익힌 것에만 안주하여 쓸데없는 논쟁으로 헛되이 세월을 보내는가.” <화엄론절요(華嚴論節要)> 서문에 있는 말씀이다. 지눌은 당시 <화엄경>을 읽다가 선교가 하나라는 근거를 찾고 얼마나 기뻤던지, 읽고 있던 경전을 머리에 이고 방안을 빙빙 돌았다. 하지만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만큼 선과 교의 회통(會通)을 간절히 원했던 것이다. 회통이란 서로 다른 것이 만나서(會) 하나로 통하는(通) 일이다. 지눌의 지적처럼 조사의 마음과 부처의 입은 서로 어긋나지 않은데, 선종과 교종이 근원은 살피지 않고 자신의 입장만 고집하면서 헛되이 세월을 보낸 것이다.
선과 교가 다르다고 하지만 물과 기름, 혹은 삼각형과 사각형처럼 본질적인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니다. 비유하자면 물과 얼음, 수증기의 차이라 할 수 있다. 선이 수증기라면 교는 물과 얼음에 해당한다. 이들은 쓰임에 따라 각각 차이가 있지만, H2O 라는 본래(本)의 바탕(質)은 변하지 않는다. 다만 냉커피를 마실 때는 얼음이 필요하며 샤워할 때는 물, 공기가 건조할 때는 수증기가 필요하다. 또한 교종이 정삼각형이라면 선종은 직각삼각형에 비유할 수 있다. 세 변의 길이가 다르다는 차이는 있지만, 각이 3개이며 내각의 합이 180도라는 본질은 동일하다. 선종과 교종은 불교라는 본질을 공유하면서 문화와 지역, 역사라는 지엽적 차이를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이런 차이로 서로 원수처럼 싸웠으니, 얼마나 답답했을까? 상대를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어떤 말도 소용이 없게 된다. 식사하셨냐는 인사에 안 먹었다는 정도가 아니라 ‘지금이 몇 신데?’라고 성내면 참으로 난감한 일이다. 지눌의 선교회통이 의미를 갖는 것은 이처럼 어려운 간극을 줄이고 소통했기 때문이다.
선(禪)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敎)는 부처님의 말씀이다
서로 간의 오해를 줄이고 말과 마음의 간극을 줄이는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다. 그것은 바로 ‘말할 수 있는 것은 분명하게 말하고 말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하는’ 일이다. 20세기 위대한 철학자로 칭송받는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 1889~1951)의 유명한 말이다. 그는 서로가 확인할 수 있는 일은 말해도 되지만, 인간의 감정이나 종교적 언명 등은 말할 수 없다고 한다. 예컨대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 자유무역협정(FTA)을 파기하고 우리의 수출품에 관세를 매기고 있다는 것은 말할 수 있다. 누구라도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이 인간을 사랑한다거나 필자의 전생이 티베트의 승려였다는 말은 할 수 없는 일이다. 신이나 전생의 존재에 대해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말할 수 있는 것만 말하면서 산다면 사람 사이에서 발생하는 오해나 갈등은 많이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어찌 가능한 일이겠는가. 또한 상대에게 마음을 전하는 일도 쉽지 않을 것이며, 삶 자체가 재미없을 것 같다. 무엇보다 종교가 설 자리를 잃게 된다. 특히 불교는 더욱 그렇다. 불교의 핵심인 깨침(覺)은 말로 표현할 수도, 마음으로도 헤아릴 수 없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언어도단(言語道斷), 심행처멸(心行處滅)은 바로 이를 가리킨다. 부처님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마음의 세계를 45년 동안 고단한 몸을 이끌고 말해온 셈이다.
욕망과 욕망이 충돌하는 중생의 세계에서 말과 마음의 간극이 생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우리는 상대와 관계를 지속하고 싶으면 간극을 줄이기 위해 노력한다. 불자들이 공부하고 수행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상대와 관계하기 싫으면 차라리 안 보고 사는 길을 택한다. 그것 역시 개인의 선택이니 딱히 할 말은 없다.
마음을 우선시하는 선과 경전의 가르침을 중시하는 교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지눌은 선교회통(禪敎會通)을 위해 진력한 선사다. 이를 위해 그는 먼저 찰떡같이 말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선사로서 교종을 설득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선의 세계에서는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일이 가능하다. 동문서답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이 선종 내에서는 통할지 몰라도 교종이나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개떡같이 말하면 개떡같이 알아들을 수밖에 없는 것이 중생의 현실이다. 그래서 지눌은 선사이면서 논리적인 방법으로 마음을 깨치고 닦는 체계를 확립하였다. 마음과 언어에 대해 그가 내린 결론이다.
“선은 부처님의 마음(禪是佛心)이요, 교는 부처님의 말씀(敎是佛語)이다.”
읽으면 읽을수록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문장이라는 생각이다. 선과 교의 핵심을 정확히 지적하고 있는 명문이다. 부처님의 마음을 언어로 표현한 것이 말씀이니, 어찌 선과 교가 둘이겠는가. 마음과 언어가 만나면(會) 서로 통(通)한다는 것이 지눌의 결론이다. 이러한 선교회통의 정신은 오늘까지 한국불교의 전통으로 계승되고 있다. 교종에서 선을 수행하고 선종에서 경전을 공부하는 모습이 자연스러운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현상이다.
이러한 선교회통 정신은 지눌의 제자인 진각혜심(眞覺慧諶, 1178~1234)에게 그대로 전승된다. 그는 <원돈성불론>과 <간화결의론>을 합본하면서 발문을 썼는데, 이와 관련된 부분을 잠시 인용해 본다.
“아아, 슬프다…. 혹은 선을 숭상하여 교를 배척하고 혹은 교를 숭상하여 선을 비방하면서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며 교는 선의 그물(網)이요 선은 교의 벼리(綱)임을 알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선교의 두 종이 길이 원수처럼 보게 되었다.”
마음과 말이 서로를 배척하면서 원수가 되었다는 지적이다. 우리들의 일상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사랑하는 마음이나 사과의 말을 전할 때도 정성을 기울여 찰떡같이 해야 한다. 그런 정도의 노력은 기울여야 둘의 거리가 가까워지고 마음이 통하는 것이다.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일은 이때야 비로소 가능하다. 이심전심이 되기까지는 노력이 필요하다. 지눌이 선사이면서 교학을 중시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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