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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북의 인권역사문화유적지(239) |
이번호의 인권역사문화유적지는 전주 가톨릭센터입니다. 위치는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 완산구 현무 1길 40번지에 있습니다.
1970년 3월 1일에 착공, 총공사비 2,653만원을 들여 만 8개월만인 70년 10월 31일 준공된 가톨릭센타는 총건평 959평에 3층 건물로 전주시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었다. 센타 내에는 전주교구청 학생회관 별관 사회관이 있으며 2백50명을 수용할수 있는 강당 1개ㆍ회의실 1개(80명 수용) ㆍ토의실 3개(20명 수용) ㆍ다과실 1개(40명 수용) ㆍ공동 침실(60명 수용) ㆍ식당ㆍ기획실ㆍ탁구장ㆍ당구장ㆍ도서실ㆍ오락실ㆍ재봉실ㆍ세탁실 등이 마련되어 있다. 또한 JOC 사무실ㆍ학생회 사무실ㆍ신용조합 사무실이 각각 센타내에 들어있었다. 전주 가톨릭센타의 특징이라 하면 침식을 할 수 있게 공동 침실과 식당이 마련되어 있어 피정이나 소규모의 세미나 심포지움 등을 할 수도 있어 피정의 집 역할을 하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70년 10월 31일 개관 이래 사용 내용을 보면 각 정당 좌담회ㆍ경찰정보과 반공교육ㆍ각종 학술대회 및 세미나ㆍ각 직종 회의ㆍ발기총회ㆍ와이엠시에이 록원 다함께 노래부르기ㆍ부부클럽 등 단체명을 다 들수 없을 정도로 많은 단체가 있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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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센터 건물의 공식 명칭은 천주교 전주교구 청사다. 주교 집무실과 총대리신부를 장으로 하는 사무처,사목국·관리국·성소국·홍보국·사회사목국·청소년교육국 등 사무처내 6개 국과 강당, 회의실, 토의실 등을 갖춘 문화시설을 겸비했었다. 역사적인 발자취와 기능으로 볼 때 가톨릭센터는 전주 시민들의 생활문화공간이자 교구청사, 그리고 전북 민주화운동의 산실 역할을 담당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또한 가톨릭센터는 재야와 학생운동에 이르기까지 전북 민주화운동의 발원지였으며, 집회와 시위의 시발점이었다. 전북 민주화운동가들의 쉼터이자 일종의 안전한 방패기지였다. 실제로 당시 민주화운동가들은 경찰의 검거를 피하기 위해 이곳에 숨어들기 일쑤였고, 센터를 시위공간으로 이용했었다. 각종 농민 집회와 가톨릭노동청년회가 후원하는 노동집회를 포함 재야와 학생운동에 이르기까지 시위의 첫 시발점으로 모두가 가톨릭센터를 선택해 움직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톨릭센터 강당은 인혁당사건과 가톨릭농민회사건 등 시대적 사건들에 대한 진상규명의 장이었으며, 박정희 대통령의 폭정과 민주화의 필요성을 배우는 학습의 장이었다. 1970년대 말부터 활발해진 여성 노동자들의 민주노조 활동은 섬유노조를 중심으로 여성 조합장을 배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은 민주노조를 탄압해 80~82년 사이 동일방직, 반도상사, 원풍모방, 청계피복노조가 강제로 해산되거나 와해되었다. 내가 노동운동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 바로 그 무렵이다.
당시 전북지역에는 한국노동청년회(JOC)에서 상근간사로 일하며 와이에이치(YH) 노조 지원활동을 했던 이철순이 79년부터 익산에 내려와 살면서 여성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노동야학을 하고 있었다. 그가 창인동성당에 ‘노동자의 집’을 만든 뒤에는 노동운동이 더 활발해졌고 서울 쪽 노동운동가들도 전주에 자주 내려왔다. 문정현 신부는 60년대 후반 전동성당 보좌신부 시절 노동자들과 어울릴 기회가 있었지만 그때는 노동운동에 대해 잘 몰랐다. 78년 4월 동일방직 노동자 124명이 무더기로 해고되었을 때는 당시 사목국장이었던 리수현 신부와 함께 전주 가톨릭센터 옥상에서 동일방직 사건에 대한 유인물을 뿌렸다. 그때 노동문제에 대한 인식이 싹튼 셈이었다. 이후 82년 전북지역에서 유일한 민주노조였던 태창메리야쓰 노조 탄압 사건을 겪으면서 문신부는 노동운동의 일선에 됐다고 한다. 가톨릭센터가 시국강연과 민주화를 갈망하는 집회장 소로 점점 비좁게 느껴질 즈음, 중앙성당과 전동성당 남문교회 성암교회 등이 그 역할을 이어받았지만, 10.26을 전후해서 빠르게 진격해오는 군화발을 한동안 감당하지 못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윽고 재야와 학생들의 전열도 가다듬어지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오는 대학의 정문을 넘어 팔달로로, 육교로, 도청으로 이어졌다. 그래도 가톨릭센터는 여전히 군사정부에 대응하는 유일한 전진기지였다. 유신반대의 막내 475세대가 그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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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민주화 기도회가 열린 전주 전동성당과, 유신체제에 항거하는 자발적 학생 시위가 최초로 열린 전주고, 또 군부독재 반대를 외친 투사들의 집결장소였던 전주 성광교회와 가톨릭센터 등은 모두 전북의 민주화 운동을 상징하는 역사적 현장이다.
가톨릭 역사는 물론 1970∼80년대 도내 민주화운동 산실로 자리했던 전주가톨릭센터가 43년간의 서노송동 시대를 마감하고 '간납대' 인근으로 옮겼다. 천주교 전주교구청은 전주시 남노송동 옛 전주공전 자리 1만6,000여 평에 새로운 보금자리 부지를 마련, 2005년 9월 1일 오후 3시 30분 기공식을 가졌고, 새 센터 전주교구청사는 2006년 완공했다. (이종근의 역사문화 이야기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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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센터는 전북특별자치도의 민주 인권의 상징적인 장소입니다. 1970년대부터 박정희 유신정권에 반대하는 기도회와 전북도민의 농성장 이었습니다. 1980년대에는 광주학살 진상규명과 전두환 군부독재에 맞서 민주화운동의 선구자적 역할을 담당하는 장소였습니다.
가톨릭센터는 특히 1987년 6월 국민대항쟁시에는 수배자와 민주인사가 기거하며 민주인권 투쟁을 전개했던 장소입니다. 가톨릭센터는 천주교 유지재단 전주교구의 사무실과 사제관이였습니다. 그러나 민주인권투쟁을 하다가 쫓기는 인사들과 학생들을 숨겨주고, 재워주고 함께 지원하는 전라북도 민주인권 유적지의 상징적인 장소입니다.
전북의 민주인권유적지 가톨릭센터를 보존하고 기억하는 일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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