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의 인권 역사 문화 유적지(53)
이번호의 인권역사문화유적지는 김제 수류성당입니다.
위치는 전북 김제시 금산면 수류로 643번지 입니다.
수류성당은 1888년 6월 전라도 지역으로 파견된 파리외방전교회(M. E. P.)의 베르모렐(J. Vermorel, 張若瑟 요셉) 신부가
고산 빼재공소(현 전북 완주군 운주면 구제리)에 거처하면서 신자들을 찾아 순방하다가
1889년 5월 제7대 조선대목구장 블랑(J. Blanc, 白圭三 요한) 주교의 허락 아래 자신의 거처를 금구현의 배재(현 완주군 구이면 안덕리)로 이전함으로써 ‘배재성당’으로 설립하였습니다.
이후 베르모렐 신부가 1893년 4월 서울의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교수로 전임되면서 조조(M. Jozeau, 趙得夏 모이세) 신부가 2대 주임으로 부임하였으나, 이듬해 7월 동학농민군들을 피해 상경하다가 공주에서 피살되었습니다.
1895년 5월 배재성당의 3대 주임으로 임명된 사람은 라크루(M. Lacrouts, 具瑪瑟 마르첼로) 신부였습니다.
그는 성당에 부임한 뒤 그 위치가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같은 해 10월 초 금구 배재에서 가깝고 교통이 편리한 금구현 수류면(水流面) 상화리(上禾里, 현 김제시 금산면 화율리)로 성당을 이전하였고,
그 결과 배재성당은 ‘수류성당’으로 개칭되었습니다. 이어 4대 주임 페네(C. Peynet, 裵嘉祿 가롤로) 신부는 1903년 6월 정읍의 신성리성당(현 시기동성당)으로 분가하였으며,
1906년 초부터 성당 신축을 시작하여 1907년 10월 1일 한옥 목조 성당(48칸)을 완공한 뒤 경향신문사 책임자로 있던 드망즈(F. Demange, 安 플로리아노) 신부를 초청하여
「성모성탄」을 주보로 정하고 봉헌식을 가졌습니다. 이후 1909년 3월에는 남학교인 인명학교(仁明學校, 현 화율초등학교의 전신)를 설립하고, 1918년에는 여학교도 개교하였으나,
이 학교는 재정 문제로 1928년 폐교되었습니다.
수류성당의 신자 수는 일제 강점기 말까지 꾸준히 증가하였습니다.
그러나 한국전쟁 직후인 1950년 9월 24일 성당이 전소되고 50여 명의 신자들이 인민군에게 피살되면서 수류 신앙 공동체는 한동안 김제성당의 공소(公所)가 되었습니다.
이후 1960년 3월에 부임한 13대 주임 김반석(金盤石, 베네딕토) 신부가 성당을 면소재지인 금산면 원평리로 이전하면서 ‘원평성당’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수류 신자들은 성당 이전 직전인 1959년에 현재의 성당과 옛 사제관·수녀원을 자력으로 완공하였으며, 1966년 4월에는 성당이 다시 수류로 복귀하면서 ‘수류성당’이 되었습니다.
이후 수류성당에서는 20대 주임 이순성(李順成, 베드로) 신부 재임기인 1980년 6월에 사제관을 신축하였고,
25대 주임 박대덕(朴大德, 스테파노) 신부 재임기인 1999년에는 청소년 야영장을 건립했으며,
29대 주임 원종훈(요셉 다미안) 신부 재임기인 2009년에는 수류성당 설립 120주년 기념행사를 갖고 다음해 7월 야영장 내에 숙박 시설 산촌체험관을 건립하였습니다.
천주교 수류성당은 1890년대 호남지역 3대 성당의 하나였으며, 동양권에서는 천주교 신부를 가장 많이 배출한 곳입니다.
현재도 200여명의 신자들이 천주교 신앙공동체를 이루고 살고 있으며,
한국전쟁기에는 민간인이 집단으로 희생되었던 천주교 유적지입니다.
성당설립 131년이 지난 지금도 전라북도의 아름다운 순례길 중 하나이며 신앙의 자유와 삶의 공동체로 자리잡은 전북의 명소입니다.
'인권누리 뉴스레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냐와 함께 하는 행복연습] <47> 2022 새해 소망을 노래하기 (0) | 2022.04.07 |
---|---|
인권누리 웹진 제52호 전북의 인권 역사 문화 유적지 (0) | 2022.04.07 |
인권누리 웹진 제51호 인권누리에서 불어오는 인권바람이야기 (0) | 2022.03.31 |
[수냐와 함께 하는 행복연습]<46> 기쁨을 불러오는 송년 행복질문 (0) | 2022.03.31 |
[수냐와 함께 하는 행복연습]<45> 아무것도 안 하기(Doing Nothing) (0) | 2022.03.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