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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누리 웹진 제58호 전북의 인권 역사 문화 유적지

인권누리 2022. 5. 18. 11:22

전북의 인권 역사 문화 유적지(60)

이번호의 인권역사문화유적지는 조성만 통일열사 추모비입니다.
위치는 전북 전주시 완산구 계룡산길 88번지 해성고등학교 정문 입구에 있습니다.

“사랑 때문이다. 내가 현재 존재하는 가장 큰 밑받침은 인간을 사랑하려는 못난 인간의 한 가닥 희망 때문이다. 이 땅의 민중이 해방되고 이 땅의 허리가 이어지고 이 땅에 사람이 사는 세상이 되게 하기 위한 알량한 희망, 사랑 때문이다.” - 1988년 3월 조성만 일기 중에서

1964년 12월 13일 전라북도 김제군 용지면 용암리 126번지에서 부친 조찬배씨와 모친 김복성씨의 차남으로 태어난 조성만은 전북 김제시의 용암초등학교를 마치고 전주 서중학교와 해성고등학교를 거쳐 1984년 서울대학교 자연대학 화학과에 입학하였습니다.
대학교에 들어가면서 조 열사는 민주화와 한반도의 통일 문제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광주 5·18 민중항쟁 8주기를 맞아 민가협 등 재야민주단체 주최로 열린 ‘양심수 전원 석방 및 수배 해제 촉구 결의대회’의 열기가 뜨겁던 1988년 5월 15일 오후 3시 40분경이었습니다.
조 열사는 서울 명동성당 교육관 4층 옥상에서 “양심수 가둬 놓고 민주화가 웬 말이냐!”, “공동올림픽 개최하여 평화통일 앞당기자!” “조국통일 가로막는 미국놈들 몰아내자” 등의 목소리가 핸드마이크로 외쳤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흰색 한복을 입은 조 열사는 손에 쥐고 있던 칼을 자신의 배에 꽂고 5장의 유서를 뿌리며 몸을 날렸습니다.
이내 행사장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조성만은 즉시 백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그날 저녁 7시, 24년이란 짧은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1988년 5월 19일 낮 서울시청 앞에서 치러진 조성만의 장례식 노제에는 30만 명에 달하는 인파가 운집하였습니다. 그의 관이 서울대 아크로폴리스 광장에 들어섰을 때 8천명의 학생과 교수들의 시간이 멈췄고, 조 열사는 광주 망월동 묘역에 묻혔습니다.
조 열사의 죽음을 전후로 대중적인 통일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됐고, 1989년 임수경과 문규현 신부의 방북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조성만 열사는 민주주의와 통일에 대한 공적을 인정받아 2001년 8월 민주화운동 명예 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에서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았고, 2021년 6월에는 국민훈장 모란장에 추서되었습니다.

조성만 열사 추모비는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에 서울대 학생과 동문 중심으로 1993년 5월 세워져 있습니다.
그리고 전북에는 1999년 5월 15일 조 열사의 모교인 전주 해성고 정문 입구에 천주교 신자, 사제, 해성고 동문 들을 중심이 되어 세워져 있습니다.
그리고 김제 시민공원에는 2015년 5월 이세종 열사와 더불어 조성만 열사 추모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차마 떠날 수 없는 길을 떠나고자 하는 순간에 척박한 팔레스티나에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한 인간이 고행 전에 느낀 마음을 알 것도 같습니다.” - 1988년 5월 15일 조성만열사의 유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