썬전자 민주노조운동
홍명희
썬전자 민주노동조합 사수투쟁은 당시 80년대 후반 노동-학생운동 연대의 상징이었다.
87년 민주대항쟁 이후 노조설립과 노동자 대투쟁은 전국의 ‘태풍의 눈’이었다.
전북의 노동자들은 운수산업 노동자들의 시작을 기점으로 섬유산업 노동자들이 들고 일어섰다.
87년 투쟁이 단순하게 근로조건과 임금인상을 위한 자연발생적인 파업이었다면, 1988년은 조직적인 활동으로 노동자들의 권리투쟁인 노동조합결성과 결합 되었다.
1987년 6.29 선언은 실질적으로 노동자들의 요구사항이 전부 빠지는 모욕을 노동자들에게 가져다주었다.
그것은 노동자 스스로의 자기혁신으로 조직화 되지 못하는 것에 대한 한계와 닥쳐오는 정치위기에 대해 시급히 대처하지 못하고 급변해가는 현실투쟁에 따라가지 못하는 안타까운 상황이었다.
노동자들은 스스로의 조직을 강력하게 구축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극단적 억압으로부터 참아왔던 불만을 즉자적으로 터트리는 경우도 있었지만 노동조합이라는 조직적 무기를 확보하면서 장기전에 돌입할 준비를 하였다.
가두투쟁에서 공장으로 투쟁의 장소가 바뀌었다.
자본가들이 중간층을 민주화라는 미끼로 개량화하여 자유주의 민간정부를 꾸리겠다는 꿈을 꾸고 있을 때 노동자들은 자연발생적이긴 했으나 계급적 문제를 전면에 내세우며 노동자 대투쟁의 깃발을 올린 것이다.
부당해고, 구사대폭력, 매수, 협박 등으로 민주노조들이 탄압받고 상당수가 어용화되기도 했지만 7-9월 석 달동안 전국의 3,400여 사업장에서 임금인상 및 노동조합 건설을 내세우며 노동자들은 투쟁을 전개했으며 1,400여개의 노조가 새로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들불처럼 타오른 전북 지역의 노동자들은 88년부터 89년에 걸쳐 많은 노동조합을 건설하였다.
군산 지역을 시작으로 시작된 신규노조 건설 흐름은 88년 익산 지역을 거쳐 89년 전주 지역으로 옮겨 가면서 전북지역 전역에 걸쳐 민주노조의 씨앗을 심었다.
자본가들은 ‘노조 설립은 절대 인정할 수 없다’, ‘힘이 있는 파업 투쟁은 조기 타결 후 관망하면서 분열시킨다’, ‘힘이 없는 노조는 초기에 박살낸다’, ‘감당할 수 없는 경우는 회사를 폐업한다’ 같은 탄압을 통해 약속이나 한 듯이 개별노조를 공격했다.
노동자들의 투쟁은 점차 장기화 되었고, 직장폐쇄와 위장폐업, 위원장들의 해고로 인해 노조가 와해 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투쟁으로는 407일 동안 싸운 전주 썬전자 노동자들의 투쟁과 외자기업 철수로 인한 생존권 확보 투쟁을 202일간 벌인 익산 아세아스와니 노동자들의 투쟁, 그리고 기존 어용노조를 민주화시킨 익산 쌍방울메리야스 노조 민주화 투쟁이다.
또한 88년의 전북의 대표적 투쟁은 전라북도노동조합 연합회(이하 전북노련) 결성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라 볼 수 있는 창신공업사(전 국제정비노조), 백양나염 노동자들의 민주노조 사수투쟁과 후레어훼숀 노동자들의 임금인상 투쟁이었다.
민주노조운동은 노동조합의 자주성과 민주성을 회복하기 위한 운동으로 노동자 스스로가 생존권 투쟁을 주도할 노동자조직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파업·시위·농성 등을 통해 정권과 기업의 탄압에 대항하면서 노동조합을 결성하거나 기존 어용노조를 민주화 시키는 운동을 말한다.
민주노조의 대부분은 경공업 여성 노동자들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이는 수출 공업화 정책에 따른 덤핑수출로 인해 여성노동자들의 희생이 가중되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민주노조운동의 또 하나의 특징으로는 종교운동 혹은 지식인 운동과의 결합을 들 수 있는데, 썬전자 민주투쟁 역시 학생운동가 출신의 전현숙 노조위원장을 중심으로 전개한 투쟁이었다.
당시의 민주노조운동은 조합원의 이해를 대변하는 경제적인 투쟁이기도 하지만, 민주노조설립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대정부 투쟁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때문에 407일간의 장기간 투쟁은 재야세력, 종교지도자, 학생운동 진영의 전폭적인 지원과 연대투쟁을 함께 80년대 후반 전북지역 노동운동의 상징이었다.
또한 여성노동자들의 헌신적인 단결 투쟁은 여성노동운동가들의 순수성과 진보성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썬전자 민주노조운동은 자본가의 이윤추구에 맞서 자신의 권리를 지키고자 하는 노동권투쟁이었으며, 여성노동운동의 진보성과 노동해방을 지향하는 민주화 투쟁이었다고 자부할 수 있다.
1988년 4월 6일에는 썬전자 노조가 설립되었다.
그 당시 생산직 360명, 관리직 100여명으로 전사원이 500여명에 가까웠으나 노조설립 이후 회사 측은 신규사원을 거의 채용하지 않고 공장 자동화를 추진하면서 자연 감원에 의해 1989년 3월께에는 210명으로 줄었다.
회사측이 대학출신 노동자가 위장 취업했다는 이유로 해고를 시키자 이것을 계기로 13명이 모여 노조를 설립하게 됐다.
노조설립 후 해고자 원직복직, 임금인상(남자 1,710원·여자 1,290원) 등의 요구안을 가지고 교섭을 진행했다.
이에 대해 회사 측은 교섭을 기피 하면서 일방적으로 근무시간을 2교대에서 3교대로 바꿨고, 노동위원회에 쟁의 발생 신고를 먼저 냈다.
이에 노조에서는 회사 측의 단전, 단수에도 불구하고 철야농성에 들어가고 3월 4일 전면 파업에 돌입했다.
회사 측은 즉각 업무방해로 간부 7명을 고소 및 고발하고 농성장에 구사대를 투입하였다.
그 당시 회사 측의 전형적인 탄압 유형이었던 구사대 폭력은 썬전자에서 위력을 발휘했다.
구사대들은 호주머니에 칼을 넣고 다니면서 ‘죽여버리겠다, 가만두지 않겠다’고 협박하면서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파업을 지원 나온 이웃노조 조합원들을 쇠파이프, 각목, 소방호스를 휘둘러대며 무차별적으로 폭행하기도 했다.
이에 전북지역 노동자들은 썬전자 조합원들이 당하는 것을 보고 자위대와 선봉대의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다.
당시는 교섭이 잘되지 않으면 무조건 파업에 돌입하던 시기였는데 노조는 회사 측이 위장폐업신고를 내자 마침내 89년 1월 26일부터 407일간 장기농성을 하게 되었다.
회사 측은 11월 14·15일 새벽에 공권력을 투입해 24명을 집단 해고시켰다. 또한 전현숙 노조위원장을 비롯해 백정애 등 3명을 구속시켰고, 저를 비롯한 8명의 노동자들이 불구속 되었다.
이후 90년 4월 8일 교섭이 타결되었고, 회사 측은 회사명을 쏘렉스로 변경하였다.
당시의 투쟁에서 전현숙 위원장과 함께 투쟁하였던 박경숙씨는 2001년 불치의 병으로 세상을 떠나기도 하였다.
당시 전현숙 전 썬전자 노조위원장은 지역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해마다 하계수련회·등반대회·송년잔치 등을 열며 노조원들끼리 단합했었습니다.
이런 노조원간 단합을 통한 끈끈한 조직력이 1년 넘게 투쟁을 이끌 수 있었던 힘이 됐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지난 1989년 당시 전북의 노조 가운데 가장 긴 407일간의 장기투쟁을 벌였던 썬전자 노조를 중심에서 이끌었던 전현숙 전 노조위원장은 전북대 간호학과 84학번으로 학생운동에 적극적이었던 그녀는 다니던 학교를 휴학한 채 혈혈단신으로 썬전자에 취업, 노동운동을 전개했다.
처음 노조를 설립할 당시 발기인은 전사원 500여명중 12명에 불과했다.
이후 노조가입 자격이 없는 일부 관리직 사원을 제외한 450여명의 직원 대부분이 노조의 필요성을 절감하면서 동참, 사측이 위협을 느낄 정도로 그 세력이 커졌다.
하지만 사측은 너무 열악한 근무환경을 개선하자는 뜻에서 임금인상을 원하는 노조의 요구를 묵살한 채, 철저하게 노조를 탄압했다.
비노조원인 관리직 직원 50여명으로 이른바 ‘구사대’를 조직하여 노조원들을 감시하거나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당시 전북의 대부분 회사에서 노조가 설립되기 시작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주들은 노조가 만들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며 “단지 생계를 유지하기 너무 빠듯하니 월급을 올려달라고 요구한 것뿐인데 사측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또한 “당시 경찰 정보과 형사나 노동부의 근로감독관들이 회사에 수시로 드나들면서 노조를 와해시키기 위해 노조원들의 동태를 파악, 사측에 정보를 제공하기도 했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당시 썬전자내 구사대는 협박과 폭언, 회유 등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노조를 탄압하는데 앞장섰다.
노조원들은 분임토의를 통해 여성 노조원들이 함께 모여 고함을 지르거나 소리를 지르는 등 구사대에 맞서기 위한 나름대로의 대안을 마련, 대처하기 시작했다.
노조를 지원하기 위해 파견된 한 노동운동가는‘솔벤트로 지하창고에 불을 지르겠다’고 협박, 구사대를 쫓아내기도 했다.
하지만 이 운동가는 훗날 이 일로 인해 경찰에 구속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이처럼 사측의 온갖 탄압에 조직력으로 맞서며 장기농성을 벌이던 중 1989년 11월 14일 새벽 공권력이 투입돼 농성장에서 새우잠을 자고 있던 전 위원장 등 노조원 10여명이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
당시 전 위원장 등 노조원 4명은 구속되고, 나머지는 불구속 입건됐다.
당시 50여일간 전주교도소에 수감됐었던 전 위원장은 “구속된 노조 간부들에게는 업무방해를 비롯해 방화혐의까지 덧씌워졌었다”며 “이처럼 파업이 지속되다보니 많은 동료들이 생계유지를 위해 회사를 떠났었다.
너무 안타까운 마음에 하루빨리 사측과의 싸움을 끝내고 회사를 정상으로 돌려 놓아야겠다는 마음뿐이었다”고 회고하였다.
특히 전 위원장은 당시 노조활동을 주도하며 어린 여성 노조원들의 정신적 지주역할을 하다 병을 얻어 8년 간의 투병끝에 지난 2001년 세상을 떠난 고 박경숙씨(당시 38세)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려온다고 하였다.
지난 90년대 초반 노조원들을 중심으로 ‘햇살’이라는 친목모임을 만든 후 매년 그를 추모하고 있다.
“경숙이 언니는 당시 노조원들을 대표해 사측의 갖은 탄압에 정면으로 맞서 싸웠는데 이로 인한 스트레스로 병을 얻었어요.
동료들은 지금도 해마다 언니를 떠나 보낸 곳에서 언니를 생각하며 안타깝고 슬픈 마음을 달래고 있어요.”
전북의 민주노동운동에서 407일간의 장기 농성을 벌인 썬전자 농성장은 현재 팔복동 예술공장으로 되살아나 많은 이들이 찾는 명소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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