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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누리 웹진 제74호 회원의 붓

인권누리 2022. 9. 16. 09:47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의 일과 행복

 

- 전 준 형 -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뭔지 아니?"
"흠.. 글쎄요,
돈 버는 일? 밥 먹는 일?"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란다.
각각의 얼굴만큼 다양한 각양각색의 마음을.... 순간에도 수만 가지의 생각이 떠오르는데..
그 바람 같은 마음이 머물게 한다는 건... 정말 어려운거란다."
- 생텍쥐페리, ‘어린왕자’에서


千江有水 千江月
달은 하나지만 천개의 강이 있으면 천개의 달이 비친다.
진정한 벗은 서로 부족한 부분을 하나씩 깨닫게 해주는 사이다.
바닷물이 출렁이며 서로 뒤섞이지만 조금도 늘어나거나 줄지 않은 이치처럼

사랑을 줄 수 있으려면 우리는 갖고 있지 않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줄 수는 없다. 사랑을 줄 수 있으려면 먼저 당신에게 사랑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가르칠 수는 없다. 사랑을 가르치려면 먼저 당신이 사랑을 이해해야 한다.
- 레오 버스카글리아의《러브》중에서 -
그렇습니다. 마른 우물에서 두레박물을 퍼올 릴 수 없습니다. 자기 안에 기쁨이 넘쳐야 남도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먼저 행복해야 남도 행복하게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 있어야 사랑을 나눌 수 있습니다. 시대의 변화 속에서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먼저 사랑이 전제되고 이를 실천하는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과 촉진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이 먼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공부를 해야 하는데 공부 중에서 먼저 민주주의를 학습하고 실천을 경험해야 합니다.
민주주의입니다. 민주주의를 이해하고 학습하고 실천하는 것이 우선적으로 필요한 덕목입니다. 시대는 급변하고 있습니다. 현대 사회가 복잡하고 다양해짐에 따라 사회 관리도 고도의 전문적 지식을 요하게 되며 한층 복잡해집니다. 진정한 민주 사회에서는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와 예속이 없어지고, 모든 사회 성원의 진정한 자유와 평등이 실현될 것이며,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공동체 전체의 발전과 조화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이때가 언제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인 민주주의의 완전한 실현을 향한 세계인의 발자국은 지속적으로 남겨질 것입니다. 다양하고 복잡할수록 개개인의 의사를 소통시키고 조정해가는 민주주의에 대한 실천 이것이 핵심입니다. 그러면 수많은 사람들의 의사를 소통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할까? 일상적으로 소통하는 문화가 만들어져야 하고 서로 소통하는 네트워크망이 촘촘해 질수록 발휘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의 고유한 권리는 어느 국가나 사회의 권력에 의해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본성에 기초한 원천적 권리로서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인간 고유의 권리인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그의 성별, 종교, 인종, 출신, 언어, 재산, 학벌, 사상 등 기타의 어떠한 개개인의 지위와 관계없이 누구나 기본적인 인권을 누릴 수 있도록 보장되어야 마땅하며 우리는 이것이 현실사회에서 작동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역사 속에서 인간을 보면 노예적인 삶과 만인이 자유롭고 평등해지는 삶을 추구해 왔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소수의 지배계급, 왕족 외에 피지배 계급의 다수는 ‘노예’로 살아 왔습니다. 노예는 신분적, 육체적으로 완전히 종속된 삶을 살아야 했지요.
그러나 중세 봉건시대, 우리나라로 치면 고려, 조선 시대로 넘어오면 신분적인 예속이 없는 평민 계급과, 그 아래에 종살이를 하는 천민 계급으로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서구 사회에서는 ‘농노’라는 계급이 있어 신분적으로는 예속되어 있지 않았지만 토지관계로 해서 속박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120년 전 갑오동학농민혁명은 조선의 사회를 평등하고 자유로운 인간을 만들기 위한 투쟁의 산물이었습니다.
인권은 자본주의 사회 이후로 넘어오면서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천부인권사상’이 성립되었습니다.
이는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본성적으로 예속을 거부하는 인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죽음을 무릅쓰고 투쟁해 왔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헌법 제1조의 의미>-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를 상기해 봅니다.
한국사회 120년사는 자유와 평등을 향한 수많은 투쟁의 역사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어떤 비인간적 억압과 굴종, 이를 강요하는 폭력에 대해서 맞서 싸우며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프랑스 인권선언> 자유, 평등, 박애의 정신이 그러했으며 <헌법 제34조> 사회보장 등에서 “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가진다”로 명문화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혼자서 살 수 없고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나를 중심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것, 다른 누구보다도 내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개인주의입니다.
누구에게나 ‘나’는 소중하지만 인간관계를 떠난 ‘나’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가족, 친구, 직장 동료, 친목 모임, 하다못해 버스를 같이 타고 출퇴근을 하는 사람, 내가 먹을 쌀을 생산하는 농민들과 떨어져서 고립된 채로 인간은 살아갈 수 없습니다.
즉, 본래의 ‘나’는 개인적인 동시에 집단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 측면을 동시에 고려하지 않으면 ‘나’를 온전히 살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추구권> 헌법 제10조 “기본적 인권의 보장” -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갖는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권리를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개인은 저마다 마음속에서 갈등하며 삽니다. 어제의 가치관이 오늘의 가치관과 다르며, 작년에 사랑하던 사람을 올해는 미워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전에는 흥미 있었던 일이 웬지 요즈음에는 시들하게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로 인해 갈등과 고민이 생깁니다. 이는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고정된 실체는 사실 없습니다.
무엇인가 변화운동하고 있다는 것은 그것이 ‘완전한 실체’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불완전하기 때문에 변화가 있는 것입니다.
불완전하다는 것은 사회 내에서는 대립갈등과 대화 타협 등의 다양한 행동양식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어떤 인간의 역사도 ‘갈등-투쟁’ 이라는 개념의 도움 없이 설명될 수 없습니다.
특히 노동자와 기업주들처럼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집단들 속에서 갈등과 대립, 분쟁이 일어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며, 문제는 어떻게 대처하고 해결해 나가는 것이 가장 슬기로운 방법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갈등은 변화와 발전의 원동력이 됩니다. 갈등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며, 갈등이 있는 곳에서 변화가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모두 누구나 자신의 자아를 발견하고 자신의 삶의 의미와 보람을 스스로 찾으려는 강한 내면적 욕구를 갖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욕구도 실현시키면서 학습과 공동체의식, 서로의 문화적 차이를 존중하면서 배제하지 않는 이성적 사고를 키울 수 있는 기회들을 제공해 줄 수 있도록 먼저 솔선수범(率先垂範) 해야 할 것입니다.
선배들은 개인적인 문화적 체험보다는 집단주의(集團主義)와 위계질서(位階秩序)를 경험이 많아 문제 해결의 방식에서도 그러다 보면 반인권적인 모습이 연출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디서든지 전문성을 획득해야 더욱 튼튼하게 지속적으로 행동 할 수 있습니다.
특히 21세기 활동력은 끊임없는 학습에서 형성됩니다. 일반적 법칙과 구체적 상황에 맞는 구체적 분석을 하기 위해 공부해야 합니다.
공부는 과학적인 학습 태도가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글자 그대로 “알아야 면장도 합니다.”

사람들은 대화하길 원합니다. 말걸기와 주제를 초월하는 대화는 소통과 공감을 이루기 위한 필요한 관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대한 배경 설명을 하고 싶어 합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에게는 귀중한 경험이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는 자세가 있어야 하며, 그런 자세를 유지하지 못한 인간관계는 폭력적일 수 있습니다.

하나의 인간이, 매우 뛰어난 사람이라 하더라도 다른 인간을 완전히 송두리째 바꾸어놓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아마 드물게는 있을 수 있겠지만, 그 조차도 없던 것을 있게 만드는 것은 불가능할 겁니다.
인간에게는 본래 엄청난 가능성이 잠재해있어서 서로서로 교통(交通)하는 과정에서 잠재된 힘이 솟구치는 것일 뿐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이를 ‘산파’에 비유하였습니다. 자신은 아이를 낳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낳는 조력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지요.
우리는 다른 이의 아이를 낳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아이를 낳을 뿐입니다. 살다보면 때로는 좋다가도 때로는 절망감에 휩싸이게 됩니다.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어떤 사람이 싫어질 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문제점에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확실히 공감할만한 문제점이 나오는 게 일반적입니다.
그 애가 잘못한 것 같아. 그런데 말입니다. 그러면 어쩌자는 것입니까? 이 세상에 문제없는 인간은 없고 흠집투성이인 인간들만 득시글대는데 어떻게 자기 생각이나 문제의식에 완전히 합치하는 인간을 내어놓을 수 있습니까? 만약 무결한 인간들만 아웅다웅 대는 사회가 되면 부족함 투성이 인 부족한 사람에게는 어떻게 끼어들어 살아갈 수 있습니까? 인간은 원래 부족한 것입니다.
본래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과학적이지 못한 것이고 심리적으로도 힘들게 됩니다.
왜? 항상 날을 새우고 살아야하니까요. 어떤 점이 부족한가를 살피지 말고 무조건 받아들이라는 게 아닙니다.
왜 그 인간의 부족함을 보는가? 하는 것이 달라져야하는 것입니다.
너는 이게 문제야! 라고 지적하기 위해서 무엇이 부족한지를 보는 게 아니라 그 인간이 보다 풍부해지는데 어떤 부분을 채워야하는 가를 적절한 시간대에 적절한 방법으로 이야기하기 위해 탐구해 가는 게 인생입니다.
대부분 항상 함께 사는 처지가 아닌 바에야 시간이 없거나 시간을 못 내서 간극이 벌어지는 경우가 훨씬 많은 게 아닙니까? 일을 일상적으로 함께하는 처지라면 기회는 그만큼 많습니다.
만나는 시간을 일부러라도 만들 수 있다면 너무나 감사하지요. 나 자신도 잘 지키지는 못하지만 원칙을 하나 바로 세우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이를 욕하지 않습니다. 다만 살아가며 조언할 뿐입니다” 가능하면 이 원칙을 입장이 너무나 많이 다르다고 느끼는 다른 사람에게도 적용할 수 있는 능력이 아직은 부족합니다만 늘 상 만나는 일반 사람들은 사실 더 이상한 논리를 갖고 있는 데도 해해거리면서 밥을 나누는데, 우리는 왜 이리 안 되는 것입니까?
<노자도덕경>에 곡즉전 규즉영,(‘曲卽栓 窺卽盈’)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굽어있으니 펴지는 것이요, 비어있으니 채워지는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장자>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못생긴 나무가 고향을 지키는 이야기입니다. 비루하고 못난 자들이야 말로 일반 적인 인간의 본모습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구를 지킵니다. 잘난 존재들은 아마도 지구 아닌 다른 별로 옮겨갔거나 옮기고 있는 중 입니다.
우리는 지구인이고, 한반도에 태어났고, 하나의 인간에 불과한 사람이며 흠집있는 인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무엇인가 많이 부족한 세상이야말로 우리가 살만한 세상이고, 우리가 변화를 펼칠 수 있는 사람들이야말로 가능성의 화신입니다.
사회의 부조리는 사회변혁의 동인으로 전화하고, 인간의 부족함은 세상을 바꾸는 힘으로 전화합니다. 문제는 그것을 끝까지 믿어줄 수 있는가?입니다.
서로를 신뢰해야 합니다. 무한수용(無限受用), 무한노력(無限勞力)이 가능한가에 달려있습니다. 그러한 전화가 가능하게 만들 수 있는가에 달려있습니다.
우리는 부족한 사람들이고 모자라는 인간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입니다. 부족함을 인식하고 간절히 기도하며 우리 꿈을 소중하게 여깁니다.
기도하며 자기성찰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 정신을 유지한다면 꿈★은 이루어집니다.

먼저 자신의 삶에 대해 고민하고, 다른 이를 배려하며 우리들이 새롭게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새로운 사람이 되엇으면 합니다.
우선 추구되어야할 가치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요, ‘행복’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뿌듯한 행복감을 느낄 때, 세상 속에서 ‘사람’을 발견할 때, 나 자신과 다른 이들의 인간다움을 발견할 때 우리는 감동 속에서 매일 매일 새 출발을 기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새로운 삶은 먼저 삶의 푯대를 세우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꿈을 갖는 것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꿈을 실현하기 위한 삶의 원칙을 세우는 것은 꿈 자체와 분리되지 않는 것입니다.
꿈과 꿈을 꾸는 사람을 분리할 수 있을까요? 꿈은 꿈을 실천하는 자의 것입니다. 꿈을 꾼다 해도 그 꿈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 꿈은 개꿈이외에 아무 것도 아닐 것입니다.
세상사가 복잡해도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바는 다를지라도 이를 집중적으로 다툴 필요가 없으며, 중요한 것은 항상 현실에 머무르지 않는 꿈과 실천을 밀어갈 수 있는가하는 것을 중시하는 것입니다.
“생각이 ‘다른 것’은 다른 것 일뿐 아무것도 아니며, 그것은 ‘틀린 것’과 다릅니다.” 문제는 꿈을 꾸는 주체의 유무입니다.
나아가, 삶은 힘든 것으로서가 아니라 즐기는 것으로 다가올 때라야,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사심(私心) 없이 헌신하는 것이라야, 누구를 가없이 여기는 연민(憐愍)을 뛰어 넘어 자신을 채근(採根)하고 다른 이의 단점(短點)까지도 포용(包容)하는 것이라야 우리의 삶은 더욱 빛을 발휘할 것이며 그 속에서 21세기 우리의 미래는 발전할 것입니다.

중국 남송 시인 육유(陸游)의 한시 중 ‘산중수복 의무로 유암화명 우일촌(山重水複 疑無路 柳暗花明 又一村·첩첩산중에 물이 겹겹이라 길이 없을까 싶어도 버드나무 흩날리고 꽃이 피어오르는 그곳에 또 마을이 있다)’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간절히 열망하고 소망하는 꿈을 만들고자 더욱 열심히 살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