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누리 뉴스레터

인권누리 웹진 제97호 회원의 붓

인권누리 2023. 2. 16. 12:39

자리의 무게

정관성

 

“팀장님 채용계획일정표 작성해서 보내드렸습니다. 검토 바랍니다.”
며칠 전 보고 받은 내용입니다. 사무실은 조용했고, 누구도 저와 마주앉아 상의하지 않았습니다.
사무실 컴퓨터 모니터에서 당근색으로 깜빡이던 알림을 누르니 올라온 보고였습니다. 비교적 나이가 많은 직원들과 생활하다가 90년대 직원들로 구성된 팀으로 인사발령을 받은 게 지난 2월 1일입니다.
일도 생소하려니와 젊은 직원들과 소통하며 적응하는 일도 낯선 상황입니다. 그 중에서 가장 독특한 것이 “메신저 문화”입니다.
사무실에선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도록도록 두두두 두두두” 쉬지 않고 들립니다.
요즘 젊은 직원들은 바로 옆자리 직원에게도 문서를 보내거나 협조할 일이 있을 경우에 메신저를 보냅니다.
그렇다고 대면 설명과 지시가 없다는 건 아닙니다.
이전에 했던 일과 지금 일이 다른 경우, 일의 전반적인 흐름을 설명해야 하는 경우 등 글로 표현하는 것보다 말로 하는 게 편한 경우에는 모니터를 보면서 서로 의견을 전달하고, 이전 문서를 찾아 확인시켜주는 모습도 자주 봅니다.
“바로 앞에 있는 저한테 메신저로 보고하는 이유가 도대체 뭘까요?”
바로 전 팀장이던 동료에게 물었습니다. 간단하게 말로 하면 그만인 걸 왜 메신저로 전하는지? 내가 좀 거리감이 있는지? 혹은 불편하게 했나? 여러 생각이 든다고 했습니다.
“팀장님 그건 공식적으로 보고했다는 기록을 남기려는 겁니다.”
앞서 팀을 맡았던 팀장은 책임소재를 분명히 하려는 요즘 세대의 문화라고 했습니다. 생각해보니 우리 선배 중 한 명은 별명이 “내가 언제 그랬어.”이고, 또 한 명은 “난 모르는 일인데.”였습니다.
선배 간부가 지시한 것을 직원이 하고 있는데, 선배 간부보다 높은 사람이 방향을 틀거나 아예 일을 중지시켜버리면 대뜸 자기가 언제 그렇게 하라고 했냐고 자기는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떼는 못된 버릇을
별명으로 만들어 우리끼리 부르던 것이었습니다. 물론 필자도 여러 번 당해봤고 대들고 싸우고 결국 피해는 약자인 당시 직급이 낮았던 “버릇없는, 싸가지 없는, 위아래 몰라보는, 조직에 맞지 않는 직원”이 봐야 했습니다.
생각해 보니, 젊은 직원들이 메신저로 보고하고, 상급자가 확인해 준 메신저를 보관하는 것은 현명한 처사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우리 땐 메신저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을까?” 혹은 “그때 메신저가 제대로 되었어도 메신저로 보고하면 당장 불려가서 또 혼났겠지?”란 생각에 이르면,
기술의 발달과 권위에 대한 견제는 서로 끌어주고 도와주고 섞이는 융화의 과정이 아닌가 싶습니다.
며칠 전 나라의 안전을 책임지는 행정안전부장관이 국회에서 탄핵되었습니다. 헌정사상 초유의 일이라며 여야가 한바탕 설전은 벌이는 모습도 연출되었습니다.
이태원 참사의 책임을 지고 장관직을 그만두라는 말은 야당이 아니더라도 국민 상당수가 요구했습니다.
군대를 갔다 온 사람들은 이런저런 경험들이 있습니다. 자신이 아무리 능력 있고 잘 해도 사병들이 사고 치면 책임을 지고 간부들이 옷을 벗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신의 직접적인 잘못은 없다고 하나 포괄적인 관리책임을 지고 그 험난한 길을 걸어 지켜온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나가는 걸 보면 “인생살이 복이란 게 정말 있긴 있나보다.”란 생각도 들 정도였습니다.
하물며, 국민의 안전을 책임지고 위기관리의 최선두에 서야할 행정안전부 장관이 국민들 앞에 쏟아낸 말들은 한심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피해자들의 무질서가 참사의 원인인 것처럼, 경찰, 지자체, 소방당국의 대처가 소홀했다는 참회와 반성은 제대로 접할 수 없었습니다. 책임은 하위 직급의 실무자들이 지게 되었습니다.
이태원 참사를 보면서 국민들은 공직사회의 비정함과 참혹함을 봤을 뿐입니다.
지금도 저 위에선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메신저를 버릇없는 사람들의 면피용 보고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국민들의 요구도 뭘 모르고 하는 소리며, 자신들이 했던 말잔치도 언제 그랬냐고 할 것입니다.
눈 속에 머리를 박는 꿩처럼 모르쇠로 일관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걸 무시하고 싶은가 봅니다. 그게 언제까지 가능할까요?
위에서 책임지지 않고, 자신의 자리가 갖는 책임의 무게를 자꾸 잊어버리니 젊은 사람들은 바로 코앞에 앉은 사람에게 메신저로 보고하게 되었습니다.
기억에 대한 불신보다 권위에 대한 불신이 더 큰 사회가 되었습니다. 기술은 더 앞으로 나아갈 것이고, 누군가의 속임수와 무책임은 결코 망각의 저편으로 지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걸 모르는 자들의 무지와 안일에 심심한 애도를 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