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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의 인권 역사 문화 유적지(131) |
이번호의 인권역사문화유적지는 장수 백용성 선생 생가입니다. 위치는 전라북도 장수군 번암면 죽림2길 31번지에 있습니다.
백용성(1864~1940)은 전라북도 남원군 하번암면(현재 전라북도 장수군 번암면) 출신입니다. 그의 속명은 상규(相奎), 법명은 진종(辰鍾), 법호는 용성(龍城)입니다. 유년 시절부터 불교와의 인연이 남달랐던 그는 열네 살에 남원시 밀덕암으로 출가를 단행하였으나 아버지의 반대로 실패하고 열여섯 살에 해인사로 정식 출가를 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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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용성 선생님은 해인사 극락암에서 출가하여 10년간 수행하시고, 서울에 올라가 대각사를 창건하여 포교하시면서 독립군의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맡아 지원하였습니다. 만주로 가서는 용정에 대각당을 개원하고, 일본인에 의해 쫓겨 이주해온 우리 백성들을 위해 의약품. 의복을 지원하였으며, 농토 ' 70정보'를 확보하여 농사를 지어 살아가도록 '선농일치운동'으로 기반을 마련하고 그들과 독립군활동을 지지하였다고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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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의 나이 48세 때인 1911년 서울에 올라와 한 신도의 집에서 본격적인 포교활동에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1912년부터는 교화에 전력하여 3년 만에 3천여 명의 신도를 모았습니다. 또한 대각사(大覺寺)를 설립하여 포교와 불교 개혁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1919년 3.1독립운동 때에는 한용운과 같이 불교계를 대표하여 민족대표에 서명하였습니다. 백용성 선생은 서대문형무소(옥고 18개월)로 면회온 시자에게 '육자진언'과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외워보라고 하고, 독립군이 걸인 행색을 하고 와서 깡통을 두드릴 때, '옴마니반메훔'을 3번하고 '밥 좀 주소'하라는 일화는 선생이 독립운동에 얼마나 헌신했는지를 알려줍니다. 형기를 마치고 나오신 백용성 선생은 한국 최초로 불경 '조선글 화엄경' 80권 전량을 우리말로 번역하고, 승단에 필요한 불경들을 우리말로 펴낸 역경가였으며, 손수 풍금을 치고, 찬불가 작시를 하여 도심 포교와 나도 깨닫고, 너도 깨닫고, 함께 깨달아 실천하자는 대각 불교를 펴 보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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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입적할 때까지 백용성 선생은 일제에 의한 전통 불교의 일본화에 강력히 반발하였고, 포교의 현대화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용성 백용선 선생은 독립운동가이자, 불교의 현대화·생활화를 주창한 분으로 생가가 있는 장수의 죽림정사에 방문하여 항일 독립운동의 유적지를 탐방하길 권유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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