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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의 인권 역사 문화 유적지(135) |
이번호의 인권역사문화유적지는 정읍 백정기 의사 기념관입니다. 위치는 전라북도 정읍시 영원면 영원로 1049(은선리 928)번지에 있습니다.
백정기 의사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로 일제강점기에 아나키스트 계열로 독립운동을 했습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습니다. 백정기 의사 묘소는 서울 용산구 효창동 효창공원에 있는 삼의사 묘, 이봉창, 윤봉길 묘소와 함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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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정기 의사는 1896년 1월 19일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신운리 운기마을 149번지의 빈농가에서 아버지 백남일(白南一)과 어머니 파평 윤씨 윤문옥(尹文玉) 부부 사이에서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집안은 부유한 편에 속했고, 12세 되던 1907년 전라북도 정읍시 영원면 은선리 갈선마을 734번지로 이사하여 이곳에서 성장했습니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기미독립선언서와 전단을 가지고 고향에 내려가 독립 만세 시위를 이끌었습니다. 그 후 동지 4명과 함께 서울과 인천 등지에 잠복하여 일본군 군사 시설 파괴 공작을 계획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었고, 중화민국 봉천성 심양현(瀋陽縣)으로 망명했습니다. 중국에서 수많은 독립운동을 펼치다가 1933년 3월 17일 중화민국 일본 공사 아리요시 아키라(有吉明)를 습격할 준비를 하다 원심창(元心昌), 이강훈(李康勳) 등의 아나키스트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었습니다. 이후 일본 나가사키시로 이송되었고, 1933년 11월 24일 나가사키지방재판소에서 원심창과 함께 살인예비 및 치안유지법 위반 등의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습니다. 이후 나가사키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지병이던 폐결핵이 재발하여 1934년 6월 5일 오후 11시에 옥사, 순국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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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정기의사기념관(白貞基義士紀念館)은 사단법인 백정기의사기념사업회가 1997년 의열사(義烈祠)를 짓기 시작하여 2004년 6월 5일 준공된 의열사 안에 백정기 의사의영정을 봉안함으로써 개관하였습니다. 총면적 20,849㎡의 기념관 부지에는 의열사를 비롯해 구파기념관, 청의당, 의열문, 숭의문, 백정기의사 동상, 어록비, 순국비, 추모비 등이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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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상해 육삼정에서 백정기 의사가 1933년 3월 17일 의거한 날 침략거두 아리요시(有吉明) 일파 도륙을 모의하며 동지들에게 남긴 말입니다. ????나의 구국일념은 첫째, 강도 일제로부터 주권과 독립을 쟁취함이요. 둘째는 전세계 독재자를 타도하여 자유평화 위에 세계 일가의 인류공존을 이룩함이나 공생공사의 맹우 여러분 대륙침략의 왜적 거두의 몰살은 나에게 맡겨주시오.????
구파 백정기 의사는 유언에서 "나는 몇 달을 더 못살겠다. 그러나 동지들은 서러워 말라. 내가 죽어도 사상은 죽지 않을 것이며 열매를 맺는 날이 올 것이다. 형들은 자중자애하여 출옥한 후, 조국의 자주독립과 겨레의 영예를 위해서 지금 가진 그 의지, 그 심경으로 매진하기를 바라오. 평생 죄스럽고 한되는 것은 노모에 대한 불효가 막심하다는 것이 잊혀지지 않을 뿐이고 조국의 자주독립이 오거든 나의 유골을 동지들의 손으로 가져다가 해방된 조국 땅 어디라도 좋으니 묻어주고 무궁화꽃 한 송이를 무덤 위에 놓아주기 바라오." (일본 나가사끼 이사하야 형무소에서 운명하기 며칠 전 육삼정 의거를 도모했던 이강훈 의사, 원심창 의사에게 남긴 유언입니다.) 일제에 대항하여 평생 독립운동을 펼친 백정기 의사의 발자취를 살펴보길 권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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