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종 교수 (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아침에 햇볕이 가장 먼저 드는 곳은, 저녁 때가 되면 그늘도 가장 먼저 깔린다. 일찍 피는 꽃은 시들기도 다른 꽃들보다 빠르다. 이것이 진리이다. 운명이란 돌고 돌아, 한 시각도 멈추지 않는 법이다. 그러므로 세상에 뜻을 세운 사람이라면 일시적인 재난으로 말미암아 청운의 뜻을 꺾어서는 안 된다."
다산 정약용이 강진 유배지에서 두 아들에게 보낸 글 가운데서 나오는 귀절입니다. 여러해 전에 보물로 지정된 <하피첩>(霞被帖)을 읽다가 눈에 띤 말씀입니다. <하피첩>의 내력을 잘 아실 것입니다. 아내 풍산 홍씨가 결혼식 날 입었던 다홍치마폭을 가위로 잘라, 그 위에 '죄인' 정약용이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린 다음 손수 표구까지 했다고 합니다. 다산은 양주 옛집에 두고온 두 아들을 생각하며, 그리고 윤씨 집안으로 시집간 딸을 그리며 <하피첩>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편지글에 보이는 일찍 핀 꽃이 바로 다산 자신이었어요. 20대에 발신(拔身, 출세)하여 영화를 누리며 승승장구하다가 10년만에 고꾸라진 신세였으니까요. 햇볕이 가장 먼저 든 곳처럼 정약용의 집안은 한때 정말 잘나갔던 것인데요. 알다시피 신유박해를 만나서 압해정씨 일가는 하루아침에 몰락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거짓이 판을 칩니다. 진실의 빛은 여전히 희미하고, 정의로운 이들이 뜻을 펼칠 날은 언제 올지 요원해보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의 어둠을 잉크 삼아 우리는 희망의 노래를 써내려가야 하겠습니다. 검찰과 언론으로 집약되는 소수 기득권층이, 날마다 거짓으로 사람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있는 듯합니다. 답답한 심정입니다만, 깨어 있는 여러분이 계셔서 마음에 저윽이 위안이 됩니다. 갑진년 청룡의 해가 밝아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