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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의 인권역사문화유적지(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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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호의 인권역사문화유적지는 완주 구호서원입니다.
위치는 전북특별자치도 완주군 봉동읍 구미2길 44번지에 있습니다.
완주군은 오랫동안 전주부에 속해 있었던 관계로 전북특별자치도와 전라남도의 타 시·군 지역에 비해 크고 작은 유물·유적이 많습니다.
선사시대 유적으로는 구이면 덕천리의 지석묘군과 이서면 상림리의 유병동검(有柄銅劍), 소양면 대흥리의 마제석검, 봉동읍 제내리의 무등리입석(舞登里立石 : 전북특별자치도 민속자료 제3호)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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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은 1675년(숙종 1)에 축조된 소양면 대흥리의 위봉산성(威鳳山成 : 전북특별자치도 기념물 제17호)과 대치산성(大峙山城)·고중리산성·고성산성(古成山城)·산성동산성·산북리산성·길마재산성·구억리산성·만수산성(萬壽山城)·신덕리산성(新德里山城)·백현산성(柏峴山城)·이전리산성(泥田里山城) 등이 있습니다.
봉수대로는 탄치봉수대(炭峙烽燧臺)가 있는데, 동쪽으로는 고중리산성, 남쪽으로는 대불리봉수대, 서쪽으로 용계산성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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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문화재로는 고산면 읍내리에 고산향교대성전(高山鄕校大成殿 : 전북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 제116호)이 있고, 서원으로는 1730년(영조 6)에 세워진 구호서원(龜湖書院)을 비롯해 호산서원(湖山書院)·용강서원(龍岡書院) 등이 있습니다.
구호서원은 1730(영조 6)년에 전라북도 완주군 지역의 유림이 공의(公議)를 수렴하여 창건하였습니다.
1777년(정조 1)에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798년(정조 22)에 중건하였습니다.
그 뒤 1869년(고종 6)에 이르러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인해 훼철되었습니다.
전라북도 완주군 지역의 유림은 1870년에 설단(設壇) (즉 묘제(墓祭), 시제를 지낼 때 사용하는 방법)하여 ‘백산(栢山)’이라고 이름했습니다.
1904년에 단의 이름을 고쳐 ‘구호(龜湖)’라 하였습니다.
1970년에 서원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박상충(朴尙衷), 이성중(李誠中), 박은(朴?), 송유저(宋有著), 임사수(林士壽), 박소(朴紹) 등 9인의 위패가 모셔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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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호서원의 사당은 전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구조입니다.
4칸의 강당 백산재(柏山齋), 내신문(內神門), 모현문(慕賢門), 협문(夾門), 입덕문(入德門), 4칸의 수직사(守直舍) 등이 있습니다.
구호서원에서 배향하는 주벽은 박상충이며, 그 외에 이성중, 박은, 송유저, 임사수, 박소, 박종열(朴宗說), 임치우(林致愚), 유기섭(柳基燮) 등 8명이 배향되어 있습니다.
매년 2월과 8월의 중해(中亥)에 향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서원과 사우의 건립과 훼철, 중건의 역사는 유교사상의 영향 아래 선조와 선현을 숭배하였던 조선조 향촌사회의 성격은 물론, 유교의 폐단이 두드러지게 표출되었던 조선 후기 양반사회의 성격을 엿볼 수 있습니다.
특히 구호서원의 변천을 통해 전라북도 완주군의 지역사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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