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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양의 기사 VS 한국의 선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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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역사학자, 서강대 명예교수)
서구 여러 나라는 기사도의 전통을 공유했다. 그 어원도 하나였다. ‘기사’란 중세 라틴어의 ‘카발라리우스(caball?rius)’이다. 문자 그대로 말 탄 병사를 가리켰다. 기사도는 프랑스어로는 ‘슈발러리(chevalerie)’였다. 곧 기사의 법규라는 뜻이다. 영어로, ‘쉬벌리 코드(chivalry code)’라 해도 동일한 뜻이다. 스페인어의 ‘꼬디고 카바예리스코(codigo caballeresco)’ 또는 ‘까바예리(caballeria)’도 전혀 차이가 없다. 독일어로는 ‘리터르리히카이쓰코데(Ritterlichkeitscode)’라고 부른다. 역시 그 뜻에는 조금의 차이도 없었다. 유럽 어디서든 기사도란 ‘기사의 법규’인 것이다.
믿기 어려울 지도 모르겠는데, 역사 속의 기사는 일종의 폭력집단이었다. 그들은 무기와 갑옷을 독점적으로 소유했다. 그 당시 수준에서 보면 고도의 살상무기를 소유했기 때문일까. 여차하면 그들은 약탈을 일삼았다. 강간도 마다하지 않았다. 평민들을 상대로 잔학행위를 자행하였고, 동료 간에도 재물과 권익을 둘러싸고 배신을 일삼았다. 사실상 부랑배나 다름없는 기사들이 흔했다.
기사들은 농업이나 상업 등 생업에 종사하지 않았다. 일상적 경제활동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기사들이 믿을 것은 오직 무기뿐이었다. 전쟁이 일어날 경우에 대비해 서구사회는 어디에서나 기사들을 필요로 하였다. 하지만 평시에는 여러 모로 성가시고 귀찮은 존재가 바로 그들이었다.
서양 중세사회는 어떤 식으로든 기사들의 폭력행위를 제한하려 했다. 휘하에 그들을 거느린 봉건 영주는, 저마다 자신의 형편에 따라 일정한 규모의 봉토를 기사들에게 나눠주었다. 사회적 특권도 그들에게 허용했다. 생계가 안정된 기사라면, 함부로 사회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흉년이 들면 기사들은 곧 사나운 폭도로 변해 농민들을 약탈하였다. 이것은 기정사실이었다. 아니, 사실은 영주의 처지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영주도 약탈자였다.
사태를 더욱 꼬이게 만드는 심각한 문제가 하나 더 있었다. 봉토를 받지 못한 기사들이 상당수 존재했다. 경제적 위치가 불안했으므로, 그들은 도처에서 문제를 일으켰다. 그들은 왕과 영주 또는 교회의 통제가 미치지 않는 곳에서 산적이나 다름없이 굴었다. 조직폭력배들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은 농민과 상인들에게 ‘보호’의 대가를 요구했다. 멋대로 통행세를 갈취하는 일도 많았다. 무리를 지어 도적질을 일삼을 때도 있었다. 기사들의 사회적 일탈은 유럽 중세사회의 어두운 그림자였다.
기사도는 이러한 사회문제를 완화하기 위해 등장하였다. 기사들이 도덕과 예의를 내면화하도록 함으로써, 사회 안정을 꾀하였던 것이다. 당시 유럽사회를 지배한 것은 기독교회(정확히는 로마가톨릭)였다. 로마교황청의 권위가 세속 정치권력을 압도하던 시절이었다. 교황청은 곳곳에 독립적인 영지를 소유했고, 주교, 대주교, 추기경 등 고위 성직자가 영주노릇을 하였다. 상당수 기사들은 직접적으로 교회의 지배를 받았다. 설사 그런 경우가 아니었다 해도, 교회의 사회적 영향이 막강해서 아무도 교회의 간섭에서 벗어날 수 없는 형편이었다.
더욱 구체적으로 말해보자. 10-11세기 유럽 사회는 매우 불안정하였다.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중앙권력이 제대로 발달하지 못했다. 때문에 영주들 사이에는 정치적 분쟁과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그 와중에 많은 기사들이 생계를 보장받지 못한 채 이리저리 방황하였다.
로마교황청은 유럽사회의 위기가 심각한 수준이라고 판단했다. 교황청은 적극적으로 유럽 전역의 귀족들을 통제할 생각이었다. 교황청은 '하느님의 평화'를 선포하고, 기사를 포함한 귀족계급 모두를 교회에 철저히 복종시켰다. 교황청은 유럽 각국의 왕이나 봉건영주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방대한 재산을 소유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기독교는 그 당시 유럽의 유일한 종교였고, 그리하여 교황청은 신앙심을 매개로 모든 왕과 귀족들 위에 군림할 수 있었다.
교회가 특히 주목한 것은 귀족층의 말단에 위치한 기사들이었다. 그들이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도덕적 규범을 충실히 실천하기를, 교황청은 요구했다. 이에 부응하여 기사들은 왕 또는 영주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다. 그들은 기독교 신앙에 투철한 용사가 되기를 다짐하기도 했다. 즉, 기사는 기독교 신앙에 기초하여 이웃을 사랑하고 겸손을 실천하며 타인에 대한 관용을 생활화하겠다고 서약했다. 또, 여성(과부)과 아동(고아)로 대표되는 사회적 약자의 보호에 앞장서겠다고 약속했다. 아울러 기사 본연의 임무를 잊지 않고, 제아무리 강한 적을 만나더라도 용맹하게 싸우겠다고 선언했다. 이것이 기사도였다. 기사의 역할을 다각도로 규정한 것이었다.
일차적으로, 기사는 교회의 방패막이였다. 성직자, 선교사 및 성지참배객을 보호하는 것이 그 신성한 임무였다. 또, 여성과 아동을 보호한다는 선서에서 보듯, 기사는 사회적 책무를 진 존재였다. 기사는 사회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애쓰며, 교회의 권력과 가르침에 순종하기를 맹세한 사람들이었다.
물론 이러한 기사의 규칙이 등장했다고 해서, 기사들의 악습이 일순간에 제거될 수는 없었다. 기사들의 비행은 결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이해를 돕기 위해 비근한 예를 하나 들어보자. 현대국가는 저마다 엄격한 부패방지법을 정해두고 있다. 그러나 청렴한 공직자는 어느 나라에도 드물다. 중세 서양사회라고 다를 수가 없었다. 기사도를 철저히 실천한 경우는 별로 없었다. 그러나 어느 곳에 한 기사가 있어 자신의 언행을 규칙대로 엄격히 통제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그에게는 곧 대단한 명성이 돌아갈 가능성이 높았다.
그 점은 조선의 선비들 역시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한다. 선비다운 선비는 항상 소수였다. 그러나 바로 그런 예외적인 선비야말로 사회 전체에 통용되는 가치의 준거로 기능하였다. 그들이야말로 그 시절의 모든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입증했다. 중요한 것은 숫자가 아니었다. 서양 중세의 기사들도 이와 똑같았다고 볼 수 있다. 극소수의 모범사례가 한 시대의 분위기를 결정했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다. 기사도라고 하는 것, 즉 기사의 법규가 고정불변인 것으로 알면 곤란하다. 시대와 장소에 따라 법규의 내용은 차이를 보였다. 그럼에도, 기사도 또한 표준화되었다. 기사도의 정립과 전파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것은 문자생활의 확산이었다.
유럽 중세사회에는 독서문화가 점차 발달하였다. 그리하여 기사들도 차츰 문맹 상태에서 벗어났다. 그들은 책을 읽게 되었다. 스스로도 문학작품을 창작하였다. 어느덧 기사들이 교양인으로 처신하게 되었다. 이로써 기사계층의 성격에 상당한 변화가 일어났음은 물론이었다.
그래도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중세의 기사들은 종교적, 신분적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그들에게는 여성을 존중하는 풍조가 있었다. 이른바 ‘기사도적 사랑’이 유행했다. 대개의 기사들이 아직 미혼이었다는 점과 관계가 깊었다. 젊은 기사들은 자신들이 모시는 귀부인(영주의 부인)을 향한 존경과 흠모의 정을 문학작품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특히 12세기 이후에 한동안 그런 풍조가 유행했다. 유럽 각국에서는 기사들이 자신들의 연정을 고백한 문학작품들을 대량으로 출현했다. 그들의 작품에는 연애감정만 표현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기사의 이상형을 상정했고, 많은 작품 속에서 이를 다듬고 또 다듬었다. 그러한 문학작품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기사들은 언제 어떤 경우에도 기사도에 충실한 정의의 화신이었다. 이러한 기사문학의 성행으로, 기사에게는 반드시 지켜야할 윤리규범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회적 통념이 형성되었다.
기사도 정신은 서양 중세 귀족문화의 정수라고 볼 수 있다. 기사의 도덕심이 한껏 강조되었고, 전통적인 상무(尙武) 정신이 문자로 고정되었다. 기사는 영주에 대한 봉사를 신성한 의무로 인정했다. 기사와 왕 또는 영주의 관계 역시 법제화되었고, 거기에 종교적 신성함까지 부여되었다.
중세의 기사와 영주는 봉토를 주고받을 때 쌍방 모두 일정한 서약을 하였다. 또는 ‘재산 목록’을 만들어서 쌍방이 대조하고 확인하였다. 만약 영주와 기사의 관계에 조금이라도 변화가 생기면, 그들은 서약서 또는 재산목록을 처지에 알맞게 개정하였다. 그런데 만일 기사가 영주에게 서약한 의무를 소홀히 했을 경우에는 처벌이 뒤따랐다. 그는 기사법정에 회부되어 즉결 심판을 받았다.
기사도가 널리 퍼지자 사회인식에도 상당한 변화가 나타났다. 기사는 정의의 편이요, 타인을 위해 봉사하는 특별한 존재라는 인식이 뿌리를 내렸다. 현실 속의 기사와는 달리 관념 속의 기사는, 신의 정의와 종교적 진리에 충성을 다하는 성스런 존재가 되었다.
오늘날 인류 보편의 가치로 자리 잡은 인도주의(humanitarianism)도 기사도와 일맥상통하는 것 같다. 인도주의란 과연 무엇인가. 18세기 영국의 인도주의자들은 범죄자에 대한 잔인한 형벌의 폐지를 요구했다. 극도로 열악한 비인간적 노동조건의 개선도 촉구했다. 어린이를 강제로 노동에 종사하게 하는 것도 반대했다. 러시아의 작가 톨스토이는 자신의 문학작품을 통해 인도주의를 적극 지지했다. 중세의 기사들은 인도주의자들보다 수백 년 앞서 약자에 대한 보호를 자신의 의무로 인식했다. 그들은 정의의 실현을 당연한 의무로 자임하였다.
기사도에는 확실히 특별한 점이 있었다. 기사는 명예심이 강했고, 끝까지 직무에 충실하기를 서약했다. 전쟁터에서는 용감히 싸우며, 한번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고 했다. 기사는 누군가로부터 모욕이나 의심을 받으면 결투를 통해서라도 반드시 자신의 명예를 회복할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끝이 있기 마련이다. 16세기가 되자 사회경제적 변화가 가속되어 중세시대는 막바지에 이르렀다. 기사도에 대한 일반의 관심도 시들해졌다. 한동안 그렇게 세월이 흘러갔다.
18세기가 되자 이런 저런 이유로, 사람들은 다시 기사도에 관하여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다시 100년쯤 세월이 흐르자, 기사도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더욱 증폭되었다. 각종 문헌에서 기사도를 회고하고 미화하는 경향이 뚜렷해졌다. 19세기 유럽인들은 기사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첫째, 기독교회와 기사도의 밀접한 관계가 강조되었다. 기사는 교회의 가르침을 믿고 교회의 방침을 따랐다고 했다. 기사는 교회를 수호할 책임이 있었다고도 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기사는 이교도에 대해 자비를 보이지 않았고, 이교도를 무찌르기 위해 선전포고를 주저하지 않았다고 믿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기사란 종교적 편견에 사로잡힌 존재였다. 그러나 중세에는 그것이 충실한 기독교도의 신성한 의무로 해석되었다. 19세기까지도 서구사회의 통념은 바뀌지 않았다.
둘째, 국가에 대한 기사의 책임감이 매우 강조되었다. 기사는 나라를 사랑했다고 보았다. 기사는 하나님의 법에 어긋나지 않는 한, 모든 봉건적 의무를 수행했다는 식이었다. 요컨대 기사는 애국적이고 기존의 사회질서를 수호하는 화신이라는 인식이었다.
19세기에는 기사도가 애국주의를 고양하는 하나의 방편이 되었다. 그런데 국가에 대한 기사의 충성심을 극단적으로 강조할 경우, 상당한 문제가 일어날 것은 빤한 일이었다. 그것이 결국에는 개인에게 민족주의, 국가주의 또는 제국주의를 강요하는 수단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독일, 이탈리아, 일본이 바로 그런 역사의 함정에 빠졌다. 파시스트들은 과도한 조국애를 강요하였고, 자국의 상무적인 전통을 멋대로 과장하였던 것이다.
셋째, 19세기 서구인들은 중세의 기사도에서 근대시민사회의 미덕을 발견하기도 했다. 기사는 약자를 존중하고 보호했다고 했다. 기사는 약자에게 관대했다고 믿었다. 기사는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았고, 약속은 반드시 지켰다고 믿었다. 기사는 언제나 정의의 편으로서, 선을 실천하고 악과 불의를 타파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주장을 통해, 기사는 시민사회가 등장하기 오래 전에 이미 시민정신을 실천한 모범으로 기려졌다.
요컨대 19세기의 서구사회는 중세의 기사도를 다시 강조함으로써 시민과 국가의 관계를 강화하려 했다. 시민과 교회의 관계를 복원하려 했다고 볼 수도 있다. 아울러, 시민의 도덕성을 강조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하나의 제도와 관념이 후대에도 어떤 의미를 갖는다면, 거기에는 모종의 사회문화적 맥락이 숨어있다고 봐야할 것이다. 전통의 재발견은 그 전통이란 것이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효과적인 수단이 되리라는 사회문화적 확신에서 출발한다. 망각된 과거의 역사적 사실이 화려한 수사의 옷을 입고 찬란하게 부활하는 배경이다.
때로, 이것은 과거에 존재하지 않았던 전통의 창조로 귀결되기도 한다. 적나라하게 말해, 역사의 조작이 일어나는 것이다. 세계 역사에서 결코 드물지 않은 현상이다.
기사도에 관한 19세기 서구인의 재인식은 어떤 경우에 해당했을까. 전통의 재발견이었을까. 아니면 전통의 창조였을까. 독자들의 판단이 궁금하다.
끝으로, 기사와 선비의 길에 관한 나의 생각을 짧게 적어본다. 서양 중세의 기사도는 조선의 선비가 사는 법과 상당한 유사점이 있었다. 기사든 선비든 그들은 명예를 목숨처럼 소중히 여겼다. 책임감도 투철했다. 선비도 끝까지 약속을 지키려 했고, 환과고독(鰥寡孤獨, 홀아비, 과부, 고아, 버려진 노인)을 보살피는데 마음을 썼다. 또, 목숨을 바쳐서라도 나라를 구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는 큰 차이점이 있었다. 알다시피 선비의 무기는 칼이 아니라 붓이었다. 또, 선비는 기독교와 같은 종교기관에 복종하지 않았다. 그는 성리학(유교)의 이념에 충성을 바쳤다. 게다가 기사와는 달리 조선의 선비는 왕으로부터 한 조각의 경작지도 받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선비의 경제적 기반은 대체로 열악하였다. 그럼에도, 선비의 의무는 조정대신과 다름이 없었다. 기사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었다.
더욱더 본질적인 차이점도 있었다. 서양의 기사는 사람에게 충성을 바쳤다. 기사는 자신이 섬기는 영주(왕, 주교 포함)의 명령에 철저히 복종했다. 조선의 선비는 그렇지 않았다. 도리에 어긋난 왕명을 거역하고, 왕과 국가의 잘못된 결정에 반대하는 것이 선비의 충성으로 이해될 경우가 많았다. 선비는 명령권을 가진 이에게 순종하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는 천명(天命)에 따라 백성을 돌보고, 인과 예의 가치를 수호하며, 종묘사직의 안녕을 위해 자신을 바쳐야하는 사람이었다. 서양의 기사가 현실 권력에 절대복종한 것과는 달리, 선비는 도덕과 이념에 충성을 다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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