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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누리 웹진 제48호 전북의 인권 역사 문화 유적지

인권누리 2022. 3. 10. 10:11

전북의 인권 역사 문화 유적지(50)

 

이번호의 인권역사문화유적지는 익산 왕궁리 유적지입니다.
위치는 익산시 왕궁면 궁성로 666번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왕궁리유적지는 미륵사지와 함께 공주, 부여의 백제역사유적지구라는 이름으로 2015년 7월 8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백제역사유적지구의 세계유산 등재 주제어는 ‘백제왕도’입니다.
다시 말하면 백제왕도와 관련된 왕궁과 사찰, 방어시설인 성곽, 왕릉 등 8개 유적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왕궁리유적지는 백제 왕궁으로서는 처음이자 유일하게 확인되었습니다.
왕궁리유적지에 가보면 국보 제289호, 왕궁리 5층석탑을 비롯한 유적지 일대와 왕궁리유적전시관을 만날 수 있습니다.
왕궁리의 중심부에 위치한 왕궁리 5층석탑은 관련 문헌자료가 없어서 조성 내력이 정확하지 않습니다
발굴조사 당시 탑 주변에서 관궁사 왕궁사 등의 명문 기와가 출토되었다고 합니다.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궁성으로 쓰였다가 의자왕 전후하여 사찰로 변했을 것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전시관 안에는 상설전시관과 기획전시실로 나뉘어 왕궁리유적, 왕궁리유적의 백제건물, 왕궁의 생활, 왕궁에서 사찰로의 변화, 백제왕궁 등 5개 주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또한 발굴조사 과정의 사진과 함께 100분의 1로 축소된 유적모형, 출토유물, 유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각종 보조 자료들이 전시돼 있어서 전시관 내에서 백제의 숨결을 느껴볼 수 있습니다.

 

왕궁리유적전시관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접하는 곳에 왕궁리유적의 1/100 축소 모형과 함께 주변에 서동과 무왕, 관세음음험기에 대한 내용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서동, 즉 무왕이 익산으로 천도하게 된 배경과 관세음음험기의 기록을 이해하고 왕궁리유적 발굴조사 결과 확인된 왕궁으로서의 특징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삼국유사나 익산군지 등의 기록에 의하면 서동은 익산에서 태어나 오금산에서 마를 캐며 살아가다 신라 진평왕의 셋째공주 선화와 혼인했습니다.
후에 오금산에서 금덩이를 얻은 후 많은 사람들에게 베풀고 인심을 얻어 백제 왕위에 올랐다고 합니다. 왕위에 오른 후 그가 태어난 익산으로 천도했다는 사실은 관세음음험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왕궁리유적의 발굴조사 결과 왕궁리유적은 백제 무왕의 왕궁과 후대의 사찰유적이 같은 자리에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왕궁의 외곽은 폭 3m의 담장이 장방형으로 돌려졌는데, 규모는 약 12만㎡입니다.
남측 절반은 왕이 정사를 돌보거나 의례, 생활과 관련된 건물이 배치됐고, 북측 절반은 정원과 후원 그리고 금과 유리를 생산하던 공방으로 활용됐습니다.
또한 남측은 4단의 동서석축을 쌓아 남측에서부터 정전(正殿), 편전(便殿), 침전(寢殿) 등의 건물을 배치하고 외곽 담장에는 총 7개의 문이 있었던 것으로 조사결과 나타났습니다.
왕궁리유적의 백제왕궁은 규모나 공간 활용 방법에 있어서 일반 가정과는 확연히 구분할 수 있고 중국이나 일본의 왕궁과 유사한 배치를 하고 있어서 왕궁과 같은 특수한 공간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왕궁리유적전시관에 전시된 가장 대표적인 유물로는 수부(首府)라고 도장이 찍힌 기와, 금제품, 유리제품, 중국청자, 전달린토기, 뚜껑이 있는 그릇(완), 대형항아리, 벼루, 변기형토기, 연가 등 입니다.
수부(首府)는 한 나라의 수도 또는 서울을 의미하며, 금과 유리는 백제 최고 신분 계층에서만 사용하던 최고 귀중품입니다.
백제의 숨결이 느껴지는 왕궁리유적지를 보면 백제가 얼마나 크고 웅대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