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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누리 웹진 제60호 회원의 붓

인권누리 2022. 6. 3. 10:33

정관성 회원이 보내온글

민주주의?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민주주의(democracy)는 그리스어로 민중(d-emos)과 지배(cratos)라는 말이 만나 ‘민중의 지배(d-emocratia)’란 뜻으로 사용된 것이라고 합니다. 민중이 지배하는 정치형태를 민주주의라고 하는데, 왜 민중민주주의, 엘리트민주주의, 자유민주주의, 시민민주주의, 사회민주주의 등 민주주의 앞에 붙는 말들이 많을까요? 각각의 뜻이나 지향하는 게 뭔지 잘 모르겠고, 그 차이를 정확히 구분하여 쓰는 사람도 많지 않을 거라고 봅니다. 민주주의 하나만으로도 굉장히 많은 뜻을 포함하고 있는데, 앞에 사족처럼 붙이는 것은 본래의 뜻을 훼손하는 건지도 모르겠고요.

제게 처음 다가온 민주주의는 뭐였을까요?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저격당했을 때, 열 살이던 저는, 학교를 갔다 오면서 소식을 접하고 가슴이 먹먹했던 기억이 납니다. 초등학교 3학년 나이에 북한에서 침공하면 나라를 위해 나가서 싸워야 한다는 생각도 했고, 제가 꿈꾸던 롤 모델이자 위대한 영도자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허무하게 총탄으로 쓰러진 것에 대한 슬픔도 컸던 탓입니다. 장례식이 치러지던 날 가족들은 모두 밭으로 일하러 나가고, 혼자서 집을 지키며 텔레비전 속 운구행렬과 거리에 나선 시민들의 슬픈 표정을 보면서 훌쩍거리기도 했습니다. 가난을 몰아내고 새마을운동으로 시골도 살기 좋게 만들어 주신 위대한 대통령 각하였는데… 이러다가 우리나라가 공산주의자들의 침략을 받고 머리에 뿔이 난 김일성이 시키는 대로 강제 노동에 시달리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생각해 보니 참으로 억울하고 답답하고 참담할 거란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어린 나이에도 막연하게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한 건가… 하며 불안해 하기도 했고요.

위기에 처한 것 같았던 그 시절의 민주주의 속에서도 우리 가족은 가난에 맞서 열심히 현실을 살아가고 있었죠. 그 당시 농사를 지으면서도 계속 빚만 쌓여가던 살림에 아버지께선 사우디아라비아로 일하러 가셨지요. 우리 가족은 아버지한테 가끔 편지를 쓰곤 했는데, 편지봉투 안쪽에 글을 쓰고 봉합하는 형식의 국제 우편 봉투에 저도 몇 구절 쓰곤 했습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나라를 지키고 대통령이 되겠다고 포부를 밝힌 적도 있었지요. 아버지께선 제가 대통령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셨을까요? 가족들이 잘 지내니 더운 날씨에도 열심히 일해서 건강하게 귀국하실 거라고 답장이 오곤 했지요. 아버지가 없는 집에서 어머니는 어려운 농사일을 꾸려가셨는데, 누나 다섯 명 중 넷째 누나가 중학교 입학을 포기하고 집에서 농사일을 거들고 있었지요. 그 위로 누나들도 중학교 진학을 단념하고 서울로 돈벌이를 나간 상태였고요. 나중에 누나들은 검정고시도 보고, 대학도 다니고 한풀이를 했지만 그 시절 교복 입은 친구들의 눈을 피해 다니던 누나들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거의 유일하게 집안의 형편이나 부모님의 고통을 실감하지 못하고, 막연하게 느꼈지만 대충 별문제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칠 남매의 막내인 저뿐이었습니다. 다른 집도 크게 다르지 않아 상대적 박탈감은 덜했지만, 읍내에 잘 사는 친구들의 옷차림과 도시락 반찬은 부럽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제가 공부도 잘하고 선생님들의 귀여움도 받았던 터라 괘념치 않고 살았습니다. 다만 제겐 원대한 꿈이 있었을 뿐입니다. 대통령이 되어서 통일도 이룩하고 부모님께 크게 효도도 하겠다는 꿈이 있었죠. 글쓰기 대회에서 종종 상을 받을 때마다 꿈은 더 부풀었습니다. 낙후된 시골에 새마을운동 노래가 매일 울려 퍼지듯 흙먼지 뒤덮인 10리 길을 걷던 어린이의 가슴에 희망이 가득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우리나라 민주주의는 노동자와 민중의 피와 땀 위에서 자라났다고 합니다. 노동자, 농민, 도시 서민, 대학생은 바로 우리였지요. 대통령을 꿈꿨고, 사장님을 꿈꿨고, 장관과 국회의원을 꿈꿨고, 판검사를 꿈꿨지만 우리의 가족과 이웃들은 자신의 꿈과 상당한 거리를 두고 지켜보고 올려다보며 꿈을 버리고 구체적 삶에 적응해야 하는 ‘우리’였다는 것을 대학에 가서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1980년 가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돌아오셨습니다. 저는 가장 갖고 싶었던 축구공을 선물로 받아 기분이 하늘을 찔렀습니다. 아버지는 평소에 술을 안 드셨는데 언젠가 가까운 친척이 오자 술을 딱 한 잔 드시고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본 신문 이야길 하셨습니다. 그 나라 글은 모르겠고, 사진으로 보니 광주에서 군인들이 탱크를 몰고 다니며 사람을 죽인 사진이 자주 보였다는 거였습니다. 5·18을 간첩들이 폭동을 일으킨 것으로 알고 있던 제겐 상당한 충격이었습니다. 대학에 들어가서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영상을 보게 되었을 때 어릴 때 들은 아버지 말씀이 떠오르더군요. 물론 고등학교 2학년 1987년 6·10 민주항쟁 당시엔 오후에 일찍 학교를 마치곤 했는데, 저녁 늦게까지 시위 현장을 따라다니며 유인물을 주워 읽으며 광주학살의 주범이 전두환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습니다. 6·29 선언을 TV로 본 건 시골에서 농사를 짓던 작은아버지 집이었는데, 작은아버지께선 “쟈가 나중에 대통령 된다.”고 하시더군요. 직선제 개헌을 한다고 하는 중인데, 왜 다시 군인이 대통령이 된다고 하시는지 이해가 안 되던 생각이 납니다.

재수를 해서 대학에 들어갔던 1990년은 공교롭게도 전국노동자협의회-‘전노협’으로 더 알려진- 출범이 있던 해였으며,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이 3당 합당으로 민자당을 탄생시킨 해였습니다. 당시의 제 꿈은 대통령은 아니었지만,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여 시골에 가서 어려운 농민과 이웃에게 법률 서비스를 하는 인권변호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3월 입학과 동시에 3당 합당 반대 집회부터 시작하여, 4·19기념 집회, 민중 탄압에 대한 저항 집회 등에 참여하면서 인권변호사의 꿈은 뒤로 미루기로 했지요. 대학 2학년이 되어서는 시위 진압 경찰이 명지대학교 1학년 강경대 학생을 쇠파이프로 때려 사망에 이르게 한 사건이 터졌습니다. 그 이후로 많은 사람들이 시대의 아픔을 토로하며 분신과 자살로 항거하였고, 저는 기숙사에 살면서도 일주일에 한 번 정도 겨우 제 방에 들어가고 나머지는 학교와 학교 주변에서 노태우 정권에 대항하는 일들을 꾸미곤 했습니다. 당연히 1학년 때 장학금도 받던 성적이 2학년이 되어서 학사경고를 연속 2회 받을 정도로 나빠졌고, 집안에선 부모님과 형 누나들이 모여 울며불며 군대를 가라고 했습니다. 차마 그분들의 뜻을 저버릴 수 없어 군대를 갔지만, 약속을 하나 하자고 했습니다. 군대를 갔다 와서는 뭐든지 해도 되겠느냐고 했더니 가족들은 좋다고 우선 군대만 가라고 했죠. 물론 군대를 갔다 와서 대학 4학년이 될 때까지 학생 운동을 했더랍니다.

이때 제가 추구했던 정치적 입장은 ‘민중민주주의 실현’이었습니다. 솔직하고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사회주의 실현에 가까웠다고 봐야겠죠. 더 길게 이야기할 건 아니지만, 사회주의도 민중의 이해를 대변하는 민주주의의 한 형태라고 생각합니다. 북유럽 여러 국가들은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정치는 사회주의적 요소를 많이 품고 있다고 봅니다. 어떻든 민중이 중심이 되어 운영되는 정치를 원했던 것입니다. 앞에서 민주주의의 정의를 봤을 때 ‘민중의 지배’가 민주주의라는 그리스어 어원을 생각해 보죠. 우리나라에서 ‘민중’이란 말에 덧입혀진 거북한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아직도 우리나라에서 민중을 거론하면 정치적으로 굉장히 왼쪽에 있는 좌익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높습니다. 그야말로 우리의 이웃의 다른 이름이 민중임에도 색안경을 끼고 보곤 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경찰을 민중의 지팡이라고 할 때엔 색안경을 벗나 봅니다. 학생들과 노동자를 폭력적으로 진압하던 시절 경찰은 ‘민중의 지팡이’가 아니고 ‘민중을 패는 몽둥이’였습니다.

민중만을 생각하던 젊은 시절을 보내고, 지금은 가족 부양과 생계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의 민주주의가 더 풍성하고 큰 나무로 성장하길 바라는 마음은 여전합니다. 그래서 《독재와 민주주의》라는 책을 썼습니다. 어린이도서연구회에서 ‘2021 어린이도서연구회가 뽑은 어린이·청소년 책’으로 뽑아준 책이기도 하지요. 책을 쓰게 된 배경 이야기가 너무 길었지요? 책을 쓰면서 어쩔 수 없는 게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지식과 생각을 소개할 줄 알았는데, 제가 배우고 익힌 역사적 사실과 사건들이 문자로 써질 줄 알았는데, 쓰고 보니 그 속엔 제가 있었고 제가 살아온 삶이 있었고 제가 생각하는 제 모습이 있었던 것입니다. 《독재와 민주주의》 책에는 이승만부터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를 거쳐 박근혜 등 전직 대통령에 대해 평가하는 부분이 상당한 양을 차지합니다. 제가 제 생각을 썼지만 결코 없던 일들을 만들어서 붙인 대목은 없습니다. 나름대로 역사적 정설을 정리한 것이지요. 이렇게 말하고 보니 제 생각이 역사적 정설에 가깝다는 말이 되어버리나요?

최근 한참 동안 정치적으로, 우리나라 민주주의에 대해 깊은 회의에 빠진 적이 있습니다. 대통령 선거를 한답시고 후보들이 여러 당에서 서로 난립하고 서로의 옳음을 주장하는 과정에서 역사적 평가마저 자기들 편하게 끌어다 쓰는 모습을 여럿 봤습니다. 정치적 셈법이라고 하는데, 그 셈법의 대상은 한 표를 가진 유권자 하나하나를 놓고 주판알을 튕기는 것이지요. 그 셈법에서 자유로운 정치인을 찾아보기 힘든 상황입니다. 제가 젊은 시절 나름대로 열심히 거리와 학교에서 벌인 일들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 땅의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희생된 사람들의 노력을 저버리는 태도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오늘은 오늘을 살고 싶었으나 어제 죽어간 자들의 희생에 기대고 있습니다. 적어도 누군가에게는 부모님의 기대를 무시하며 불효를 저지르며, 자신의 생명까지 바치며, 보장된 미래의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감옥에 갇혀 전과자라는 꼬리표를 달며, 원인도 규명되지 못한 의문사의 원혼으로 살다간 사람들이 이루려던 민주주의의 기반에서 스스로를 부정하며 알량한 셈법에 연연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역겨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역사는 길고, 우리가 쓰러지고 사라져가더라도 세상은 다시 또 자기 힘을 얻어 새로운 방식으로 삶을 꾸려가고 역사를 굴려 갈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지금? 당신은? 이라고 묻는다면 뭐라 대답해야 할까요.

요즘 제가 살아가는 단면을 말하며 글을 맺을까 합니다. 저는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라는 공공기관에서 근무합니다. 노동조합을 만들 때 규약, 정관, 단체협약안 등을 만들면서 노동조합 활동의 기초를 다졌고, 노동조합 위원장도 맡았고, 부동산 투기를 하려던 기관장을 국정감사 기간에 국회의원한테 알려 더 이상 기관장을 못하게 했으며, 누군가에겐 눈엣가시처럼 직장 생활을 하고 있지요. 저도 놀랍고 저를 아는 사람들도 놀라는 것은 제가 이 직장에 벌써 20년 넘게 다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질 같아서는 사직서를 냈어도 진즉 냈을 거 같은데요. 하하하. 직장은 아이들 셋과 가족들이 먹고 살 방편이 되어줍니다. 그리고 저 나름대로 출판에 대한 애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는, 작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을 위한 법률 상식을 동화로 엮은 《법, 법대로 해!》(파란자전거, 2014)를 시작으로, 박근혜 대통령 탄핵에 맞춰 대통령 선거에 얽힌 이야기를 정리한 《대통령은 누가 뽑나요?》(노란돼지, 2017), 여성들이 법적으로 도움을 받았으면 하는 바람에서 여성에게 필요한 법을 정리한 《여자가 사는 법》(리더스가이드, 2018), 우리나라 독재자에 대항한 민주주의의 열망을 정리한 《독재와 민주주의》(가교출판, 2020) 등을 썼습니다. 작가로서 책으로 소통하며 살고자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말이면 텃밭을 일구며 각종 채소와 식물을 키우며 살고 있습니다.
너무 친환경이라 벌레와 풀이 작물을 괴롭히는 농사를 지어 작물들에게 미안한 짓을 하고 있지요.
저는 씨앗을 뿌리고, 그 씨앗들이 자라나는 것을 보는 걸 참 좋아합니다.
사무실에도 많은 화분을 두어 자리를 옮길 때마다 여간 불편한 게 아닙니다. 하지만, 그 씨앗으로부터 나온 작은 싹들이 나무가 되어 자라는 것을 보는 일은 크나큰 위안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민주주의를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민주주의는 누군가의 희생이 토양이 되어 작은 씨앗으로 떨어져 지금 위태롭게 자라고 있겠지요.
그 나무가 어떤 나무이고 어떻게 자랄지 알 수 없습니다. 딱히 정답을 찾기도 매우 어려운 게 인생사 아닐까요.
민주주의라는 나무를 키우기 위한 뭔가를 현재의 위치에서 하고자 합니다.
자전거로 출퇴근하며 소통하는 직장인이 되고, 아이들과 많은 대화를 하고, 기회가 되면 언론에 칼럼을 싣고, 심신이 지치면 풀과 나무에게 가서 위안을 받는 삶을 원합니다. 쓰고 보니 글이 무겁네요.
실제론 밝고 쾌활한 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