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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누리 웹진 제101호 회원의 붓

인권누리 2023. 3. 13. 10:47

금반언(禁反言)

정관성



며칠 전 퇴근시간이 가까워졌는데, 동네 선배한테서 전화가 왔습니다.
물어볼 게 있으니, 급하게 좀 만나고 싶다고. 일찍 저녁을 먹고 집근처 산책로를 걸을 생각이었으나, 급한 전화에 다급한 목소리를 거부할 수 없어 만났습니다.
뼈다귀해장국집에서 만난 선배는 음식도 나오기 전에 입을 뗐습니다.
“내가 일하던 곳에서 권고사직을 당했어.”
“네? 일 다닌 지 이제 겨우 석 달 아닌가요?”
선배의 담담한 표정과 달리 듣는 쪽에서 더 놀랐습니다.
“작업 매뉴얼을 익히는 데에 시간이 좀 오래 걸렸고, 나이가 좀 많아서 젊은 사람이 업무 지시하는데 부담이 많다는 이유더군.”
선배는 상당한 규모의 식료품 마트 매장에서 물건을 정리하는 매니저였고, 나이는 60대 중반이지만 건강했고, 이제는 일을 잘 익혀서 할 만하다고 하던 중이었습니다. “수습기간 3개월 지나면 업무 평가를 해서 계속 같이 일할지 판단한다고 하더라고. 일단 말미로 한 달을 더 근무할 수 있다고 하는데, 그냥 이번 주말까지만 다니고 그만 둔다고 했어.”
제 생각엔 성실하고 꼼꼼한 선배의 성품과 태도를 매장 관리자들도 잘 알고 있었을 겁니다.
고도의 전문지식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고, 수습 3개월 동안 열심히 배워서 일했는데, 사전에 교육도 없었고, 매뉴얼도 주지 않아 고생했던 게 억울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어디 노동청에라도 구제신청을 해 볼까?”
선배는 다시 다니진 못해도 자신의 신뢰를 배반한 사람들로부터 자신의 정당성을 확인받고 싶다고 했습니다.
“선배님, 금반언(禁反言)이라는 게 있어요. 자기가 한 말에 반대 되는 행동을 금지한다는 말입니다.”
3월 말까지 말미를 줬는데, 선배는 2주 남기고 그만 둔다고 했어요. 심정은 알지만 노동청에 구제신청을 할 때에는 권고사직을 취소해 줄 것을 요청해야 하는데, 다니면서 계속 출근하면서 해도 들어줄까 말까인데,
항의를 받아주지 않자 심정이 상해서 더 빨리 그만둔다고 했던 건 다닐 의사가 없다는 것으로 해석할 여지가 크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즉 그만 둔다고 했다가 권고사직 취소를 구하는 요구를 하는 것은 금반언의 원칙에 어긋난다는 말이었습니다.
기분은 좋지 않겠지만, 빨리 훌훌 털고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미 그 매장에선 일할 정이 없다고 하더군요.
항상 아침마다 웃고 같이 어울려 짐을 나르고 매장을 관리하던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은 느낌을 지우기 힘들 겁니다.
노동자 측에서 말을 바꿀 수 없다는 금반언에 앞서 매장 관리자들의 금반언도 가볍게 지나칠 순 없습니다.
60을 넘긴 사람을 뽑아서 제대로 가르쳐주지도 않고 잡일만 시키다가 시간이 좀 지나니 일 못한다고 쫓아낸 꼴입니다.
처음부터 선배를 데리고 다니며 세세하게 가르쳐준 소위 ‘사수’는 없었고, 선배는 상당 시간을 ‘조수’이면서 하나하나 물어물어 터득하고 있었습니다.
고령자 취업엔 보조금이 나온다는 것쯤은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보조금으로 최저시급 임금을 주면서 제대로 관리도 하지 않다가 시간이 더 지나면 권고사직이 어려울 것 같으니 빨리 자르고 또 누군가 희생양을 찾고 있을 겁니다.
근로계약을 맺으면서 선배는 회사가 지켜줄 거라 생각한 믿음이 있었을 겁니다.
내가 성실하게 회사에서 일하면, 회사도 나를 받아줄 것이라는 신뢰. 그 신뢰를 먼저 깬 쪽은 식료품 마트 매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간단하게 저녁 먹으며 궁금한 걸 묻는다 하여 나갔다가 막걸리만 마셨습니다. 그 선배와 막걸리잔을 마주하는 것으로 이 시대의 난맥상을 한탄했던 시간이었습니다.
선배는 다시 아파트 청소 공고를 보고 지원서를 작성할 생각을 했습니다. 그에 대한 의견도 물어 지원해 보라고 했습니다. 답답한 마음은 다른 일을 시작하면서 몸을 놀려 풀어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아파트 청소원의 미래도 썩 밝진 않을 것이란 생각에 씁쓸했습니다.
봄이 성큼 다가와서 꽃이 피고 새싹이 돋는데, 노동취약계층의 시름은 깊어만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