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인한 계절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추억과 욕정이 뒤섞고/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망각의 눈으로 대지를 덮고/마른 뿌리로 약간의 목숨을 남겨 주었다.(후략)”
T.S. 엘리엇의 <황무지> 중 “Ⅰ죽은 자의 매장”이란 시의 첫 대목입니다.
1차 세계대전 이후의 황폐한 유럽의 모습을 생각을 흐름에 따라 묘사했습니다.
죽어간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봄비가 내릴 것 같은 분위기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현대 역사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땅에서 이 시가 왜 그리 큰 공감으로 다가오는지 알 것입니다.
필자가 이 글을 쓰는 날은 4월 3일. 제주4.3항쟁 75주년입니다. 수만의 양민이 경찰과 군인의 총에 쓰러져간 처참한 학살이 있었습니다.
보름 후에는 4.19 기념일입니다. 4.19는 이승만의 불법 선거에 맞선 민중들의 분노와 희생으로 권력을 내려놓게 했습니다. 4.16에는 세월호 참사가 있었습니다.
수학여행길에 올랐던 학생들과 교사 등 300명 넘는 사람들의 생명이 바다 속으로 잠겼던 날입니다. 아직도 그 원인은 속시원하게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4월 26일은 명지대학교 학생 강경대가 백골단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맞아 유명을 달리했던 날입니다.
그 후로 많은 젊은이들이 독재와 폭력에 항거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4월은 그 어느 때보다 찬란한 꽃으로 만발하는 시절이지만,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사람들이 죽어간 때입니다.
사람들은 4월이 아니더라도 죽습니다.
우리가 4월의 죽음에 가슴 아파하고 안타까워 하는 이유는 그들의 죽음이 인간의 욕망과 인간의 추악함에서 출발한 죽음이 많기 때문입니다.
4월 1일. 사람들이 뭔가 재미있는 거짓말이 없을까 궁리하는 사이, 필자는 광주 망월동 묘역으로 향했습니다.
광주로 가는 길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고, 대지는 온통 새파란 봄기운으로 일어서고 있었습니다.
가까운 공원으로 가족들과 나들이 가기에 좋았고, 주말마다 가꾸는 텃밭에 가서 농사일 하기에도 참 좋은 날씨였습니다.
혼자 광주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맡기자니 가족들에게 좀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광주 망월동 제3묘원은 5.18민주화운동과 이후 민주화를 위해 싸우다 산화해 가신 분들이 잠들어 있는 곳입니다.
노수석 열사도 그 묘지에 잠들어 있습니다.
1996년 '김영삼 대선자금 공개 및 국가 교육 재정 5% 확보'를 위한 가두집회에 참석했다가 경찰의 폭력으로 생을 마감한 대학 후배가 노수석입니다.
1995년 군대를 갔다 온 복학생은 으레 마음잡고 공부를 한다고 여겨지던 때, 공부보다 후배들과 함께 집회에 자주 다니던 불량 복학생으로 살았습니다.
그때 입학한 학생이 노수석이었고, 5학번 선배인 저는 후배 얼굴은 잘 몰랐지만 그는 저를 아주 잘 알고 있었을 겁니다.
꼬질꼬질한 차림으로 학생회실을 지키거나 후배들 모아서 집회에 자주 참석하는 선배였으니 모를 리 없었을 겁니다.
다만 저는 수줍고 조용했다는 그를 분명 자주 봤을 건데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그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습니다.
한 동안 그는 새내기고 복학생은 너무 거물이었을까요?
1996년 3월 29일 오후. 필자는 모처럼 시골집에 가서 비닐하우스 고추모판에서 풀을 뽑으며 라디오를 듣고 있었습니다.
라디오에서 속보가 흘러나오고 같은 과 후배가 집회도중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다음날 서울로 올라가서 제일 먼저 찾은 곳은 세브란스병원 영안실이었습니다.
며칠 동안 영안실을 지켰고, 후배들과 유인물을 들고 지하철에 오르곤 했습니다.
그렇게 그해 4월이 흘러갔습니다.
또, 27년이 흘러 노수석의 동기 세 명과 저는 망월동에서 그의 얼굴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열사의 아버지를 만나 점심을 얻어먹으면서 목이 먹먹했습니다.
내 몸같은 아들을 잃고 27년을 살아오신 부모님을 보니 노수석이 세상을 뜰 때 저분들 나이에 제가 있음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서울로 학교를 보낸 대학 2학년 딸도 생각이 났습니다.
우리는 다시 꽃을 보며, 민주화가 달성되었다고 자찬하며, 봄의 향기로움을 만끽하며 어두운 터널을 빠져 나왔다고 생각할 만한가요?
4월에 죽어간 영령들의 외침은 추억으로 돌릴 수 있을까요?
망월동에서 만난 후배들과 오랜만에 만나서 저녁을 먹고, 술을 먹고, 밀린 안부를 묻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는데, 왜 이리 뒤끝이 개운하지 않을까요?
오히려 겨울이 나았을까요?
저 허위와 가식을 눈이 덮어주며 마른 뿌리에 물기를 보내주던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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