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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누리 웹진 제105호 전북의 인권 역사 문화 유적지

인권누리 2023. 4. 11. 10:29

전북의 인권 역사 문화 유적지(107)

이번호의 인권역사문화유적지는 진안 금당사입니다.
금당사(金塘寺)는 진안군 마령면 동촌리 41번지에 있습니다.
절의 창건은 650년(백제 의자왕 10) 고구려에서 백제로 건너온 보덕(普德) 스님의 11제자 가운데 한 분인 무상(無上) 스님이 그의 제자인 금취(金趣) 등과 함께 세웠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현재 경내 왼쪽의 미륵입상 앞에 연못이 있어 절 이름 그대로 금당(金塘)을 이루고 있습니다. 1682년(숙종 8) 괘불을 조성하였는데 이후의 조선 후기 역사는 공백으로 남습니다.

그리고 『삼국유사』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 보이는 보덕 스님의 행장을 통해 절의 창건 과정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보덕 스님은 고구려 후기의 스님으로서 고구려에서 열반종을 널리 알인 개조(開祖)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고구려 보장왕(재위 642~668)이 중국에서 도교를 들여와 받들 뿐 불교를 신봉하지 않자 왕에게 도교만 믿고 불교를 멀리하면 나라가 위태해질 것임을 여러 차례 건의하였습니다.
그러나 왕이 끝내 그의 말을 듣지 않자 스님은 650년(보장왕 9) 제자 11명과 함께 백제의 완산주(完山州)로 내려와 고대산(孤大山)에 경복사를 지어 『열반경』을 강의하였고, 함께 온 11명의 제자 역시 절을 짓고 포교하였다고 합니다.
금당사의 창건주인 무상 스님 역시 그 11명의 제자 가운데 한 분인데,
나머지 제자 중 적멸(寂滅)과 의융(義融)은 지금의 임실에 진구사(珍丘寺)를, 지수(智數)는 경상북도 문경 사불산에 대승사(大乘寺)를,대원(大原)ㆍ일승(一乘)ㆍ심정(心正)은 전주 모악산에 대원사(大原寺)를,
수정(水淨)은 정읍 칠보에 유마사(維摩寺)를, 사대(四大)는 제자인 계육(契肉)과 함께 진안 성수산에 중대사(中臺寺)를, 개원(開原)은 충청북도 단양 금수산에 개원사(開原寺)를, 명덕(明德)은 연구사(燕口寺)를 각각 지었다고 합니다.
이와같이 창건된 당시의 절은 지금의 위치에서 악 1.5㎞ 가량 떨어진 곳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전 자리를 고금당(古金塘), 혹은 자연 동굴을 법당으로 삼았으므로 혈암사(穴巖寺) 또는 금동사(金洞寺)로 불렀습니다.
절이 지금의 자리로 옮겨온 것은 1675년( 숙종 1)의 일입니다.
한편 또다른 창건설로는 814년(현덕왕 6) 또는 876년(헌강왕 2)에 중국인 혜감(慧鑑) 스님이 창건하였다는 말도 전하는데, 문헌의 기록이 없어 확인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절은 창건 후 고려시대 말에 이르기까지 완주에 자리한 경복사(景福寺)를 중심으로한
열반종(涅槃宗) 사찰로서 발전하였습니다. 그리고 한때 나옹 혜근(懶翁惠勤, 1320~1376) 스님이 절에 머물며 수도해 도를 얻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조선에서는 억불정책으로 사세가 많이 위축된 데다가 임진왜란ㆍ병자호란 등을 겪으면서 쇠락되었으나, 1675년 지금의 자리로 옮기면서 새로운 기운을 얻어 중창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현재 경내 왼쪽의 미륵입상 앞에 연못이 있어 절 이름 그대로 금당(金塘)을 이루고 있습니다.
1682년(숙종 8) 괘불을 조성하였고, 1914년에는 칠성탱화를 봉안하였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 전봉준 장군의 장녀 전옥례 여사(1880~1970)는 15세의 나이로 가족의 화를 피해 진안 마이산 금당사에 숨어 들어가 김옥련으로 변성명하고 금당사 공양주로 지내다는 기록만 전해오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