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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누리 웹진 제118호 전북의 인권 역사 문화 유적지

인권누리 2023. 7. 13. 20:40

전북의 인권 역사 문화 유적지(120)

이번호의 인권역사문화유적지는 동학농민혁명의 의의와 인권정신입니다.

전라북도는 근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동학혁명의 발상지로 한국 인권사상의 토대를 제공해주었다.
동학농민혁명은 조선사회의 부정부패, 그리고 외세의 침략행위에 반대하여 일어난 민중의 대규모 “반침략 반봉건”투쟁이었다.
동학농민혁명은 민주, 평등, 인간 존중 등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였으며, 그것은 인내천(人乃天, 사람이 곧 하늘이다)사상으로 나타났다

Ⅰ. 전라북도의 인권역사와 동학혁명운동
인권은 역사를 통해 재발견되고 풍부해진다. 특히 저항의 역사를 통해 인권은 더욱 발전해 간다.
근대의 저항의 사건 중에서 전라도 지방에서 일어난 동학농민혁명 운동은 인권역사의 핵심을 매우 극명하게 보여준다.
전북은 한국 근ㆍ현대사의 흐름 속에서 저항과 인권신장을 위해 매우 적극적으로 투쟁하였다.
동학혁명에서의‘반봉건’,‘반외세’로 집약할 수 있다. 동학농민혁명이 조선사회의 부정부패, 그리고 외세의 침략행위에 반대하여 일어난 민중의 대규모“반침략 반봉건”투쟁이었다.
이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제1조를 연상케 하며,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국제질서와 강대국의 이해에 휘둘리는 한국의 현실을 직시할 때‘반봉건(부정의 불공정한 사회의 개혁)’과‘반외세(자주적 주권수호)’라는 과제는 여전히 현재에도 유효하다고 볼 수 있다.

1. 전라북도의 인권 발전사 : 동학혁명
1) 동학농민혁명의 의의
동학농민혁명은 안으로는 부패하고 무능한 지배층에, 밖으로는 일본의 침략에 반대하며 평등하고 공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한국의 농민들이 스스로 일으킨 저항적 사건이다.
시기적으로 1894년 4월부터 1895년 4월까지 혁명이 전개되는 약 1년의 기간 동안 전국에서 수십만 명이 참여하였고, 그 중심이 전라도였다. 동학농민군이 지향하였던 평등사회, 정의사회 등 인권적 내용은
20세기를 넘어 오늘까지도 이어져 오래도록 기억해야 할 역사적 자산으로 남아 있다.

(1) 동학농민혁명에서의 인권사상

가.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꿈꾸다.
동학농민혁명은 전라도 지방을 중심으로 전봉준(전북 고창출생), 손화중(전북 정읍출생), 김개남(전북 정읍출생) 등 3대 지도자의 봉기 아래 조선시대 불평등한 봉건사회에서 억압받고
신음하던 농민층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약 10만명의 농민들이 목숨을 던진 투쟁이었다. 이들이 지향했던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열망은 저항과 정의 평화의 인권사상과 일맥상통하였다.

나. 인내천(人乃天)사상을 통해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다
동학농민군은 제폭구민(除暴救民, 폭정을 제거하여 백성을 구함)으로 인간 존중 사회를 지향하였으며, 광제창생(廣濟蒼生, 널리 민중을 구제)과 보국안민(輔國安民, 나라를 돕고 민중을 편안하게 함)으로
평등사회와 민주사회를 지향하였다. 이는 동학농민혁명 과정에서 민주, 평등, 인간존중 등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추구한 것이다. 그것은 인내천(人乃天, 사람이 곧 하늘이다)사상으로 나타났다.
이는 모든 사람들이 신분 및 권력과 빈부에 관계없이 존중받는 사회, 인권이 존중되는 사회를 지향하였던 것이다. 또한 동학농민군은 부당한 대우와 수탈을 거부하고 ‘보국안민창의(輔國安民倡義)’라는 슬로건에서 알 수 있듯이,
정의로운 사회를 추구하였다. 이러한 동학농민군의 정신은 인간이면 누구나 자유롭고 평등하며 정의롭고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인권의 정신이 그대로 담겨져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인류가 지켜내야 할 소중한 자산 인권 그 자체이다.

2) 동학농민혁명의 사상적 배경

동학농민혁명의 성격에 대한 일반적 이해의 요체는 ‘반봉건’, ‘반외세’로 집약할 수 있다. 동학농민혁명이 조선사회의 부정부패, 그리고 외세의 침략행위에 반대하여 일어난 민중의 대규모 “반침략 반봉건” 투쟁이었다.
이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제1조를 연상케 하며,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국제질서와 강대국의
이해에 휘둘리는 한국의 현실을 직시할 때 ‘반봉건(부정의 불공정한 사회의 개혁)’과 ‘반외세(자주적 주권수호)’라는 과제는 여전히 현재에도 유효하다고 볼 수 있다.
동학농민혁명은 많게는 수십만에 이르는 것으로 이해되기도 하는 대규모의 희생자를 내며 약 1년간 지속되었다. 그 과정에서 드러난 농민군의 생각과 행동은
동학농민혁명이 단지 ‘반봉건 반침략’이라는 틀을 뛰어 넘는다. 동학농민군의 생각과 행동이 잘 드러나 있는 포고문이나 행동강령 등을 분석해 보면 이는 더욱 극명하다고 볼 수 있다.

가. 인명 존중
동서양을 막론하고 봉건 말기나 근대 전환기에는 민중운동이 빈발하였다. 이에 따라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었다. 동학농민혁명은 민란과 달리 군현 단위를 뛰어넘어 거의 조선 전역에 걸쳐 일어난 대규모 민중 반란이었다.
농민군은 민란의 반란군과 달리 몽둥이가 아니라, 죽창은 물론 관청이나 전투 중 관군에게서 빼앗은 총이나 칼로 무장하였지만 동학농민혁명은 농민군에 의한 인명 살상이 매우 적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무엇보다 전봉준 등 지도부에서 인명 살상을 극단적으로 억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점은 농민군의 행동 준칙에서도 잘 드러난다. 1894년 3월 처음 일어날 당시에 농민군이
내건 <4대명의(四大名義)>의 첫 번째 조항은 “사람을 죽이지 않고 재물을 상하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인명에 대한 존중은 농민군 가담자가 급증하는 4월 12-16일 무렵 영광에서
발포한 <대적시 약속 4항> <12조 계군호령>에도 잘 드러나 있다. 영광에 주둔해 있던 농민군은 5리마다 복병을 두었으며, 30리 거리를 두고 2천 5백 명씩 배치하였다. 농민군의 수는 날마다 불어나
하루에 늘어나는 수가 수 천명이나 된다고 할 정도였다. 영광에 주둔할 무렵에는 농민군의 수는 무장기포 당시의 3배 이상인 1만 2,000명-1만 4,000명에 이르렀다. 또 이 무렵부터 농민군 가운데는
지배층의 탐묵과 학정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가담한 자들 이외에도 불평을 품은 자, 동학이라는 이름에 현혹되어 입당한 자, 각지의 무뢰배 등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농민군 지도부는
영광에서 농민군의 행동을 단속하기 위해 두 종류의 행동 준칙을 내렸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적시의 4가지 약속>
1. 적과 싸울 때 병사가 칼에 피를 묻히지 않고 이기는 것을 최고의 공으로 삼는다
2. 부득이 전투를 하더라도 절대로 인명을 살상하지 않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3. 행진하여 지나갈 때 다른 사람의 재산을 해치지 않는다.
4. 효자나 형제 에 우애가 있는 사람, 충성스럽고 신실한 사람이 사는 마을 가까이는 군대를 주둔하지 않는다.

<12개조의 계군호령>
1. 항복한 자는 받아들여 대우해준다.
2. 곤경에 처한 자는 구제해준다.
3. 부패한 관리는 쫓아낸다.
4. 도리를 따르는 사람에게는 경복한다.
5. 도망가는 자는 추격하지 않는다.
6. 배고픈 자에게는 음식을 먹인다.
7. 간악하고 교활한 자는 그 짓을 못하게 한다.
8. 가난한 자는 구원하여 도와준다.
9. 불충한 자는 제거한다.
10. 거역하는 자에게는 타이른다.
11. 병든 자에게는 약을 준다.
12. 불효한 자는 죽인다.

위의 조항은 우리들이 행동의 근본이다. 만약 명령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지옥에 가둘 것이다. 라고 선포하였다. <약속 4항>에서는 인명을 중시하는 내용(1, 2항)이 주목되는데, 거기에는
특히 적과 싸울 때도 살상행위를 자제하라는, 일견 납득하기 어려운 조항까지 명시되어 있다. 이 모순될 정도로 , <12개조 계군호령>에는 부정하고 탐학한 자들에 대한 경계(3, 7, 9, 10), 그리고 가난하고
약한 자들에 대한 인본주의적 배려(1, 2, 5, 6, 8, 11)가 두드러진다. 특히 부패한 관리, 간활한 자 등 민중을 도탄에 빠트린 장본인들에 대해서도 죽이라는 지시는 하지 않았다. 오직 불충하고 불효한
자에 대해서만 제거(除)하거나 죽일(殺) 것을 지시하였다. 또 <12개조 계군호령> 말미에는“위의 조항은 우리들이 거행하는 근본이다.
만약 명령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지옥에 가둘 것이다.” 고 부기하여 행동 규율에 대한 강고한 의지를 천명하였다.
동학농민군이 살상행위를 꺼린 것은 심지어 전투 중에 관군 수십 명을 전사하게 한 일에 대해 관군에게 유감을 표명한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894년 11월 대전 근처에서 동학농민군과 충청 지역 지방군이 조우하여 전투를 벌였다. 이때 농민군은 크게 승리하여 관군 70여명이 전사하였다.
농민군 지도자 전봉준은 12월 공주 우금티 전투에서 패배하여 논산으로 후퇴한 뒤, 관군에게 서로 싸우지 말고 힘을 합하여 일본군을 물리칠 것을 호소하는 글을 보냈다.
그 내용 가운데 우금티와 대전 전투에서 서로 살상한 행위에 대해 “매우 후회한다”는 표현을 써가며 유감을 표명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앞서 언급한 행동 준칙, <대적시 4가지 약속>에서도 확인되듯이 전투 중이라 하더라도 인명을 살상하는 행위가 농민군 스스로에 의해서도 정당화되기 어려워
이는 농민군이 가지고 있던 인명존중 의식을 드러내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나. “나눔과 배려”의 정신
동학농민전쟁은 부패하고 탐욕스러운 지배층의 억압과 수탈에 맞선 투쟁, 외세의 침략행위에 저항한 투쟁이기 전에 민중들이 추구하는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건설하기 위한 민중들의 몸부림이었다.
민중은 지배체제나 사회구조, 지배이데올로기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는 아니었지만, 지배체제나 지배이데올로기에 규정되면서도 거듭되는 일상생활 속에서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해나가고 있었다.
이는 동학농민전쟁 당시 농민군이 보여준 민중의식 내지 민중문화의 독자성을 “나눔과 배려”의 정신이었다.
1860년에 창도된 동학은 교조 최제우의 처형과 이어진 가혹한 탄압 속에서도 꾸준히 포교가 이루어졌으며, 1890년 무렵부터 입도자들이 급증하였다. 그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는
동학교도들 간에 사회적 평등주의와 경제적 균산주의가 실천되고 있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동학은 계급과 신분의 상하귀천, 노소를 구별하지 않았다. 또 교도들은 빈부 간에 유무상자(有無相資)를 실천하고 있었다.
당시 동학교도의 사이에서 내 것과 네 것의 구분 없이 돈과 곡식을 나누어주었다. 동학은 가진 자와 없는 자 간에 서로 도와준다는 의미의 “유무상자(有無相資)”를 중요한 덕목으로 강조하였다.
신분구별을 하지 않았고 빈부 간에 서로 나눔을 실천하였다는 것은 ‘사회적 평등주의’와 ‘경제적 균산주의’가 실현되는 세상, 곧 일종의 ‘민중적’ 리상사회를 향한 염원이 깔려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나눔의 문화’가 실현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동학농민전쟁 전개과정에서 농민군들의 “나눔과 배려”의 정신이 가장 잘 드러나는 대목은 <12조 계군호령>에서 부정하고 탐학한 자들에 대한 경계(3, 7, 9, 10), 그리고 가난하고 약한 자들에
대한 인본주의적 배려(1, 2, 5, 6, 8, 11)가 두드러진다. 이는 억압받고 가난하게 살아온 농민군들이 지향하는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의 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부정부패한 자들에 대한 처벌,
그리고‘나눔과 배려’의 실천을 통한 정의롭고 공정한 사회질서의 회복, 그것은 인권공동체에 다름 아니었다.

동학농민혁명 기록
1892년 11월 삼례 집회
1893년 3월 보은 집회
1894년 1월 10일 고부 봉기
1894년 3월 20일 무장현 봉기
1894년 3월 25일 백산집회
1894년 4월 7일 황토현 전투
1894년 4월 23일 황룡촌 전투
1894년 4월 27일 전주성 입성
1894년 5월 5일 청나라 군대 아산만 상륙
1894년 5월 6일 일본 군대 인천 제물포 상륙
1894년 5월 7일 전주화약
1894년 6월 21일 일본군 경복궁 침입
1894년 7월 6일 집강소 설치
1894년 9월 14일 삼례 봉기
1894년 11월 7일 우금치전투
1894년 11월 27일 태인전투
1894년 12월 2일 순창 피노체에서 전봉준 체포
1895년 2월 18일 동학농민혁명 최후 대둔산 전투
1895년 3월 30일 전봉준 사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