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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 자 |
정관성(원광대 강사)
날은 습하고 더웠습니다. 삶은 감자를 먹는데, 갑자기 TV에서 긴급 발표한 게 있다고 했습니다. TV 화면에 가득 찰 정도로 큰 얼굴의 노태우 후보(당시 민정당 후보)가 “김대중 사면”과 “직선제 개헌”을 발표했습니다. 작은 아버지는 뉴스를 보시면서 “다음엔 저 놈이 대통령이다. ”라고 했는데, 알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전두환과 노태우가 국민들의 여론에 밀려 직선제를 할 건데, 노태우가 대통령이 될 거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며칠 전 이른 감자를 캤습니다. 기후변화 탓인지 뭐가 부족했는지 썩은 감자도 더러 나왔습니다. 너무 늦은 수확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감자꽃이 피고 좀 지나면 하지에 즈음해서 캐 먹는다고 하여 ‘하지 감자’라 부르던 것도 옛 추억이 되어 버리나 봅니다.
고등학교 2학년 봄. 입시제도가 바뀐다고 하고, 백만 수험생이 어떻고, 누구누구는 공부를 잘 해서 어디에 있는 모 학교를 간다고 호언장담하고 고등학교 교실은 어수선했습니다. 공부와는 좀 담을 쌓고 지내던 친구 하나가 자기는 요즘 ‘데모 구경’을 다닌다고 했습니다. 전주 팔달로, 기린로, 오거리 등에서 자주 데모를 하는데, 경찰이 쏘는 가스탄에 힘들긴 하지만 볼만 하다고 했습니다.
조금 있으니, 학교가 오전 수업 후 학생들을 일찍 귀가시키는 날이 왔습니다. 친구 몇몇이 가방을 빵집에 맡기고 줄곧 따라다녔습니다. “호헌 철폐, 독재 타도”의 구호가 시내의 온갖 잡음을 압도했습니다. 경찰들의 폭력은 보기 어려웠습니다. 아마도 그때가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에 피격된 직후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주말에 집에 일하러 가면, 찌든 땀에 제대로 씻지도 못하던 부모님은 “이렇게 바쁠 때, 손이 열이라도 부족하다”고 하셨습니다. 지난 며칠간 일찍 끝난 학교 수업 후 시내의 데모 구경을 다니던 것이 몹시 부끄럽고 미안했습니다. 고생하시는 부모님의 땀내가 설핏 스쳐오면 부끄럽던 마음과 학살자 전두환을 찢어 죽이자던 시위대의 외침이 묘하게 겹쳐지곤 했습니다. 몹시 답답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될까? 공부를 잘 해서 뭐가 되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의문과 현실의 요구들이 애매하게 겹치곤 했습니다.
여전히 머릿속은 복잡했지만, 스쿨버스가 일찍 끝난 학생들을 귀가시키는 중에 집으로 향하는 버스보다 시내 방향 버스에 몸을 싣곤 했습니다. 선생님들도 간혹 길에서 마주치긴 했는데, 혼을 내기보다 조심해서 다니라고 당부하시곤 했습니다. 아마 한 달 정도, 시골집 부모님께서 농사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셨을 시간에 도서관이 아닌 시내로 발길을 돌리곤 했습니다. 어느 날인가는 독한 최루탄에 눈이 멀어버리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되기도 했습니다. 제대로 구호를 외치거나 스크럼을 짜진 않았지만, 인도에서 나눠주는 전단지를 잘 받아 읽고 일기장에 차곡차곡 정리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어렴풋이 시골에서 농사일 하며 고생하시는 분들도 잘 사는 세상이 오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직선제로 대통령을 제대로 뽑자는 이유는 민주주의의 발전이 세상을 더 좋게 만들 거라는 생각도 했더랍니다. 여러 열사가 그들의 폭력으로 산화했고, 많은 사람들이 일터와 학교에서 쫓겨났고, 혹은 불효자가 되고 책임감 없는 가장이 되는 등 숱한 좌절과 희생을 바탕으로 이룩했다는 오늘날의 민주주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후로 감자꽃이 몇 번 더 피었는지 이제 까마득할 정도입니다. 세어 보니 벌써 37년 전의 일입니다. 아직도 물 없이 삶은 감자를 먹듯, 땀내 나는 부모님 옆에 누웠던 고등학교 2학년 시절처럼 답답하기만 합니다. 아무리 후퇴와 전진을 반복하는 민주주의라고 한다지만, 그 시절 뭔가를 위해 싸우던 사람들이 높고 힘 있는 자리에 올라있지만, 사이다처럼 속이 뻥 뚫리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호미를 들고 밭으로 갑니다. 감자 캔 자리에 들깨 파종을 합니다. 감자가 자라던 땅에서 들깨가 자라고, 들깨가 자라던 땅에서 마늘과 양파가 자랄 겁니다. 민중은 감자와 들깨처럼 오늘을 성실하게 살아갈 뿐입니다. 가끔 실한 감자알이 흙에서 나오고 가끔 들깨를 거두어 들기름을 짤 겁니다. 인간으로부터 받은 실망과 민주주의의 더디고 우울한 기분보다 감자 한 알의 보람이 오늘의 우리를 이끌어가는 힘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힘 있는 자, 권력을 이용해 좋은 일이든 뭐든 하려는 자들에게 말합니다. 감자 한 알을 일구는 일상의 힘, 전에 없던 것들을 생산하는 자들의 힘, 묵묵히 세상을 먹이고 유지하는 힘, 민주주의고 정치고 아름다운 계획은 모두 그 힘 위에 자리 해야 한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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