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뻐꾹뻐꾹 |
정관성(원광대 강사)
야산 근처에서 뻐꾸기 소리가 자주 들립니다. 시골에서 자랐던 터라 뻐꾸기 소리가 들리면 아련히 옛 추억에 젖곤 합니다. 줄지어 모내기 한 벼, 하얀 꽃을 피우는 고추, 밭이랑을 덮어가는 고구마, 간식거리로도 좋은 오이 등이 뻐꾸기 소리를 듣고 자라는 때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보릿고개로 고생하던 시절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연명하다가 뻐꾸기 소리를 들으며 시름을 달랬다고 합니다. “곧 감자를 캐서 아이들 먹여야겠구나.” “보리타작을 하면 가족들이 더 굶지 않겠구나.” 이런저런 기대로 어려운 시기를 간신히 이겨냈다고 합니다. 청명하고 단순한 리듬도 마음을 편하게 만드는 뻐꾸기 소리를 흉내 내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죠.
뻐꾸기에 대한 좋은 인상이 바뀌는 건 한순간이었습니다. TV다큐멘터리에서 뻐꾸기의 탁란과 뻐꾸기 새끼의 잔인한 행동을 보며 소름이 돋았습니다. 오래전부터 뻐꾸기가 작은 새들의 둥지에 알을 낳아서 작은 새가 죽으라고 벌레를 잡아다 먹여 키운다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영상으로 본 사실은 정말이지 충격이었습니다.
“뻐꾹, 뻐꾹” “내 짝은 어디에 있니?” 뻐꾸기가 서로의 배우자를 찾는 과정에서 이미 뻐꾸기는 자기 알을 낳을 작은 새들의 둥지를 염탐하고 있었습니다. “뻐꾹, 뻐꾹” “우리 알을 저기에 낳자.” 뻐꾸기는 짝짓기 한 후에도 호시탐탐 탁란을 노리는 모습이 영상에 잡혔습니다. 결국 급하게 알을 낳은 뻐꾸기가 날아간 후에 촬영자가 가보니 작은 알 사이에 제법 큰 알을 낳아 놓고 갔습니다. 고정된 카메라에 찍힌 영상은 먼저 부화된 뻐꾸기 새끼가 원래 집 주인의 알과 나중에 부화한 작은 새의 새끼를 둥지 밖으로 밀어내는 모습이었습니다. 눈도 뜨지 못한 뻐꾸기 새끼의 잔인한 본능에 몸서리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탁란조는 9,000종 정도의 전체 조류 중에서 102종 정도로, 약 1% 정도라고 합니다. 요즘 아이들 말로 탁란에 성공하면 뻐꾸기와 같은 새들은 그야말로 “꿀 빠는” 격입니다. 부화와 양육을 전부 다른 새에게 맡겨버리고 자기들은 “뻐꾹, 뻐꾹” “우리 새끼가 잘 커야할 텐데.”라며 나무 위에서 놀고 있을 뿐입니다.
사람의 관점에서 보면 뻐꾸기처럼 살면 안 됩니다. 도덕과 윤리의 기준으로 보면 뻐꾸기는 정말 작은새 오목눈이에게 해서는 안 될 사기꾼이며 파렴치한입니다. 드라마에서 아이를 버리고 나간 엄마(사실은 쫓겨나거나 사고 등으로 헤어진)를 딸과 친척들은 몹쓸 사람으로 치부하고 비난합니다. 사회를 이끌어온 윤리의 관점에서 비난과 오해 후 이해와 공감으로 이어지는 스토리를 연출합니다. 매번 그러려니 하면서도 보면서 처음엔 화를 내고, 나중엔 아슬아슬하다가 마지막엔 “그럴 수도 있겠네.”라며 가슴을 쓸어내립니다.
뻐꾸기는 새의 알을 훔쳐 먹는 뱀과 비교해서 더 나쁠까요? 혹은 뱀은 새알을 훔쳐 먹지 말고 비건으로 살아야 할 까요? 뱀을 잡아먹는 독수리와 매는 뭘 먹고 살아야 할까요? 닭과 돼지와 소를 키워 잡아먹는 인간은 어떤가요?
살다 보니 뻐꾸기는 뻐꾸기로 만들어져서 탁란을 하고, 뱀은 뱀으로 진화하여 알을 훔쳐 먹습니다. 도덕과 이성으로 판단할 일이 아니지만 이를 보고 분노합니다. “나”는 “나의 선택”이 아닌 어떤 과정 속에서 “지금의 나”로 태어나 살고 있습니다. 다만, 뻐꾸기가 뻐꾸기로 살아가는 것과 다른 점은 “처음의 내”가 “지금의 나”로 조금은 더 나은 존재가 되고자 뭔가를 한다는 점입니다. 그게 문명의 힘이고, 인류가 쌓아온 문화의 축적입니다. 보편적인 기준을 따르고자 노력하다 보니, 어느 순간 자연의 섭리 중 하나인 뻐꾸기의 탁란에 대해서도 화를 내게 된 것입니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인정해서 안 될 것은 인정하지 않는 것. 그 사이에 우리는 판단의 기준을 세웁니다. 자기와 남이 다르다는 것, 뻐꾸기와 인간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뻐꾸기를 박멸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남을 짓밟고 제거해야 할 상대로 보는 것도 “상대를 인정함”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전쟁이 일어나고, 테러를 하고, 오갈 데 없는 난민을 배척하고, 가난한 나라 노동자를 업신여기며, 묻지마폭행을 자행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현 정부가 들어선지 이제 2년 남짓 되었고, 곳곳에서 민주주의의 위기를 말합니다. “다른 의견을 인정하지 않음”은 토론의 부재와 배제와 갈등으로 나타납니다. 누군가의 목소리를 자꾸 “뻐꾹, 뻐꾹, 사기치자.” “뻐꾹 뻐꾹, 꿀빨자.”로만 듣는 순간 서로의 공존은 어려워집니다. 뻐꾸기와 뱀과 독수리를 모두 죽여야 직성이 풀리는 상황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그간 인간이 오랜 세월 쌓아온 문명의 디딤돌 위에서 생각하고 행동하길 바랄 뿐입니다. 뻐꾸기는 자기 존재 방식에 따라 뻐꾹뻐꾹 살아갑니다. 또 그래야 하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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