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을이 오는 길목 |
정관성(원광대 강사)
입추가 지나고 한참. 8월도 하순으로 접어드는 시점에 열대야가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습니다. 예년 같았으면, 낮에는 햇볕이 따가워도 밤이 되면 풀벌레 소리 들리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 가을 냄새를 느끼던 때입니다. 높은 습도와 열대야는 냉방기 소비를 늘려, 깊은 밤 에어컨을 크고 창문을 열고 자려면 사방에서 뿜어져 나오는 실외기의 열기가 열린 창문으로 몰려오는 느낌입니다. 용기를 내어 창문을 열고 선풍기에 의존해 자고 나면 낮에도 멍한 것이 제대로 잔 기분이 안 듭니다. 몇몇의 일상이 아니고, 도시생활인 다수의 고통이 되어버린 지긋지긋한 고온과 열대야 풍경입니다.
열흘 쯤 전에 참깨를 베었고, 이번 주말엔 무와 가을 채소 씨앗을 심을 예정입니다. 벌써 파란 들판에 벼는 모두 이삭을 올리는 중입니다. 자세히 보면 잎 사이로 이삭 목이 올라왔고, 하얀 벼꽃이 먼지처럼 흔들리는 게 보입니다. 어디 부지런한 농부는 곧 햅쌀을 수확할 것입니다. 다른 해보다 이른 추석에 쓸 햅쌀을 팔기 위해 봄부터 애쓴 결실의 계절이 다가 오고 있습니다.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아침은 온다더니 열대야가 기승을 부려도 가을은 오려는 모양입니다.
최근 집안 풍경이 바뀌었습니다.
아이들과 애들 엄마는 8월 중순에 벌써 개학을 했습니다. 집보다 시원한 학교에서 생활하게 되어 기쁠 것입니다. 교사가 미칠 지경이 되면 방학을 하고, 엄마가 미칠 지경이 되면 개학을 한다고 하는데, 엄마이면서 교사인 애들 엄마는 항상 힘들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큰 애는 외국 대학에 교환학생으로 한 학기를 보내기 위해 광복절 다음날 출국했습니다. 요즘 오리엔테이션 기간인데, 두려움을 종이에 써서 비행기로 날리는 프로그램이 며칠 전 있었다고 합니다. 종이비행기 하나엔 “Trump will win(트럼프가 이길까봐)”이란 글이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대학에 총 든 경찰이 오가는 걸 처음 봤다고도 합니다.
아빠인 저는 직장에 다니지만 대학교 강사 겸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학생들에게 유익하고 재미있는 수업을 해야 하지만, 고개부터 숙인 학생들을 어찌 대해야 할지 또 막막한 마음도 있습니다. 오래 책상에 앉아 있는 것이 지루하고 힘들 수 있겠지만, 직장을 다니다 보니 저는 25년째 매일 출근하면 책상에 앉아서 뭔가를 하고 있습니다. 저도 많은 노력을 해야겠지만 학생들도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뭔가를 꾸준히 할 마음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서서히 날이 차가워지면서 겨울이 오면 한 학기가 끝나겠죠. 서로 노력하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세상 풍경도 바뀌고 있습니다.
코로나19가 다시 확산하여 많은 사람들이 병가를 내고, 입원하고, 마스크를 다시 쓰고 다입니다. 바이러스의 역습은 끝날 때까지 끝나는 게 아니었나 봅니다. 바이러스는 바이러스의 일을 하고 인간은 인간의 일을 한다지만, 팬데믹이 언제 끝났다고 벌써 의료 공백과 치료약 부족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호된 경험 이후에도 나아지기는커녕 더 나빠졌습니다. 특히 의료계와의 대화와 협력 노력은 매우 부족하여 공공의료 환경은 정말 위태롭기 그지없습니다. 특히 사회적 약자는 아프지도 말아야 하는 상황입니다.
독립기념관 관장, 한국학중앙연구원, 국사편찬위원회 등 역사와 관련된 기관에 일제 강점기를 옹호하고 친일파들에게 우호적인 사람들을 임명하고 있습니다. 제국주의와 군국주의에 경계와 비판 없는 자들의 득세는 인권과 평화의 측면에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인류에 대한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것에 대한 반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이는 정치적 노림수의 문제가 아닌 인류 공존의 가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수도권 중심으로 집값이 계속 오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방은 살기 좋은가 하면 지방은 소멸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지나친 집중과 소외가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자녀를 낳으면 수도권에서 공부를 시키고 일자리를 잡게 하고 싶지만, 이도 녹록한 건 아닙니다. 지방은 교육, 문화, 경제 등 거의 모든 면에서 취약한 상황이다 보니 지방에 사는 사람들의 바람과 현실은 간극이 클 수밖에 없습니다. 그 틈은 계속 벌어지고 있습니다. 수도권은 너무 치열한 경쟁으로 힘들고, 지방은 너무 공백이 많아 힘든 환경이 되었습니다.
더위가 광복절이 되면 어느 정도 잠잠해질 거라는 기대를 무시하듯, 정부와 지배세력은 저희 가족과 세상 사람들의 바람을 철저히 외면하고 있습니다. 가을이 없다고 하지만 어찌되었든 가을 비슷하거나 여름과 가을과 겨울이 뒤죽박죽 섞인 계절이든 뭐든 올 것입니다. 벼꽃이 피고 대추와 감이 익을 겁니다. 사필귀정의 흐름을 믿기로 합니다. 이럴수록 자기의 자리에서 조금 더 바로 서 있기 위해 노력할 때입니다.
기회가 된다면 “반인륜 범죄 옹호자 아웃(OUT)”, “고집불통 권위주의 아웃(OUT)”, “평화와 평등”, “아이들이 살기 좋은 세상”의 비행기를 접어 하늘을 가득 매우면 좋겠습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