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먼지가 쌓인 길 |
정관성(원광대 강사)
가을비가 내립니다. 이 비가 내리고 나면 열대야가 끝나고, 폭염주의보도 더 이상 없을 거라고 합니다. “이번 여름 정말 더워 죽겠다.”라는 말을 자주 들었습니다. 농담처럼 “인도에선 50도가 넘을 때도 있었다던데?”라며 그래도 더 나쁜 상황을 생각하며 위안을 삼자 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번 여름처럼 더운 때가 없었는데, 이번 여름이 앞으로 올 여름 중 가장 시원한 여름이 될 수도 있다.”는 더 현실적이며 우울한 말도 떠돕니다. 앞날이 캄캄해집니다.
8월 말. 선배 한 명이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원래 먼지였던 생명들이 먼지로 가는 것은 시간의 차이일 뿐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지만, 인간의 시간으로 보면 만 55세의 죽음은 안타까울 뿐이었습니다. 올 1월 초에 감기에 걸렸고, 20일 이상 감기가 낫질 않아 병원에 가서 이런저런 검사를 받았는데, 급성 골수성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고 합니다. 항암치료를 받던 중 갑자기 통증이 심해서 7월에 병원에 다시 입원했는데, 8월 말에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치료를 받으면 완치가 되는 경우도 있고, 상당한 기간을 버티기도 하지만 가장 운이 나빴던 경우라고 들었습니다.
9월 첫날 문자로 부고를 받고도 바로 가지 못했습니다. 너무 덥고 가문 날씨 탓에 심어둔 배추가 다 말라가는 터라 밭에 가서 물을 주고, 풋고추를 좀 따고, 들깨밭을 둘러보고 와서 점심을 먹고 수원행 버스에 몸을 실었습니다. 1년 선배와 같이했던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4년 전 다른 선배의 모친상에서 만났던 그 형과의 대화는 이랬습니다. “이제 형이랑 나는 상가집에서나 보게 되네요.” “관성아 그래도 이렇게라도 보니 반갑다.” 차를 끌고 왔던 형이 빈소에서 광주고속터미널까지 데려다주며 했던 말입니다. 다시 저와 형은 상가집에서 한 명은 살아서 한 명은 죽어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아니라 다를까. 빈소에는 대학을 같이 다닌 선후배들이 많이 모였습니다. 비교적 멀리에서 갔던 제가 비교적 빨리 도착했고, 4시부터 8시까지 빈소에서 소주잔을 비우다 왔습니다. 누군가는 주식 이야기를 했고, 누군가는 자식 이야기를 했고, 누군가는 학창시절 이야길 했습니다. 그러는 중에 망자의 어머니께서 오열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고,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모두 눈시울을 적셨습니다. 요즘에는 90세를 넘겨 고인이 되는 분들이 많은데, 80대 후반 어머니보다 앞선 형의 죽음은 애간장을 끊는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빈소에는 대학교 같은 동아리 선후배들이 많이 왔습니다. 단과대 동아리로 <노동법학회>는 저와 동기들이 주축이 되어 <법역사학회>에서 개명한 동아리였습니다. 그 선배는 1학년 집회에 나갔다가 경찰에 잡혀 구속되었고, 바로 군대를 가는 바람에 정작 만난 건 군대 휴가 때가 처음이었습니다. 그 선배는 휴가 나와서도 후배들과 같이 집회를 나갔고, 집회 후엔 같이 뒤풀이를 같이 했습니다. 노동법학회는 우리나라 노동현실에 맞서 현실을 바꾸기 위한 방안을 찾는다는 명분으로 파업현장, 노동자 피난처, 해고노동자 연대 사업, 노동자 지원 장터 등 다양한 일들을 했습니다. 지금은 직장인, 변호사, 검사, 노무사, 판사, 은행원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진 선후배들이 있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나름 제 구실을 하며 잘 살고 있었습니다. 선배들과 후배들의 성장에 서로 나름의 영향을 주고받았던 것들을 세상에 나가 풀어내며 그럭저럭 살아내고 있습니다. 젊은 날의 경험들이 지금을 살아가는 자양분이 됩니다. 따지고 보면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은 생존을 위해 존재합니다. 다만, 인간에게 다른 점이 있다면 생존에 더하여 다른 것을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엔 자신이 추구하는 것 때문에 생존을 포기하는 경우도 있고, 생명을 던져 자신이 추구하는 바를 이룩하고자 한다는 점입니다. 자신의 신념과 자신의 이상을 위해 스스로를 헌신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오래토록 거의 모든 문명에서 전승됩니다. 돌에 새겨지고, 책에 찍혀 전달되곤 합니다.
이름을 남긴 사람들의 희생과 비교해서 더 가볍지 않은 희생도 있으니, 이름 없는 사람들의 희생도 있습니다. 고귀한 가치와 신념으로 무장하여 번개처럼 살다간 사람도 있지만, 항상 고민하고 생각하며 하루하루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생각하며 살다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역사와 혁명은 교과서에 사건과 위인과 열사를 기록합니다. 기록되지 않은 민중과 이웃의 삶이 결코 가볍지 않음에도 그들이 나서서 “내 이름을 적어 주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럴 수도 없지만, 그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삶을 살았고, 나는 나의 삶을 살았을 뿐이다. 그들은 이름을 남겼고, 나는 이대로 간들 어쩌랴. 그들의 일이 위대했다면, 나의 일도 이만큼 위대한 것으로 하자.” 제게 참으로 좋은 영향을 미쳤던 선후배들을 생각해 봅니다. 아마도 그들과 제 업적이랄 것은 사람이 사라지듯 먼지처럼 사라질 것입니다. 하지만, 그 먼지들이 쌓여 인류가 걸어온 길이 되었다는 점은 확실합니다. 이성이 마비될 정도로 더웠던 여름. 먼지 하나가 역사의 길에 쌓였습니다. 우리도 언젠가 머지않아 먼지로 쌓일 것이니, 부디 덥거나 추워서 죽겠다고 하지 말기로 합시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