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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의 인권역사문화유적지(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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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호의 인권역사문화유적지는 장수 전해산 의병장 기념관입니다.
위치는 전북특별자치도 장수군 번암면 성암길 92번지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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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의 명장 전해산 의병장은 1879년 임실에서 태어나 1909년 12월 18일 일번군에 의해 체포되어 1910년 교수형으로 순국하였습니다.
묘역은 전북 장수군에 모셔져 있습니다.
전해산 장군의 본명은 전기홍이지만 바다와 산을 누벼 항일 운동을 하겠다는 의지로 스스로를 해산(海山)으로 불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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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에 이르러 전국 각지에서 항일 의병운동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을사늑약으로 국권을 침탈하자, 호남에선 최익현, 임병찬 등이 의병을 일으키게 됩니다.
고종 퇴위와 군대 해산이 일어난 정미년 (1907년)에 전북 진안에선 이석용이 창의동맹단을 결성하고, 1,000여 명의 의병들이 결집하여 나서게 됩니다.
이때 전해산은 이석용 대장의 참모로 의병 활동을 처음 접하게 됩니다.
1908년 대동창의단을 결성하고, 의병장에 올랐습니다.
남원, 함평과 영광, 나주 일대에서 활약하면서, 일본군과 70여 차례의 교전을 벌였습니다.
대동창의단을 이끌고 활동하다 심남일, 오성술, 김영업 등의 의병장들과 함께 호남의병을 하나의 연합체로 결성하게 됩니다.
'호남동의단'을 조직하여 대장에 추대됩니다.
전해산의 의병단은 일본의 대남토벌 작전에 크게 위축되었고, 전투에 패배를 거듭하던 차 순종 황제가 의병을 해산하라고 칙령을 내리자 의병을 해산하게 됩니다.
이후 남원의 깊은 산골에 서당을 짓고 아아들을 가르치던 중 체포되어 31세로 순국하셨습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고, 2015년 묘역 근처에 전해산 기념관이 설립되었습니다.
기념관에는 전해산 호남 의병장을 모신 제당인 '해산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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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은 순국하기 전 최후진술에서 일본 재판장을 향해 남기신 말씀이 잊지 못할 정도로 강하게 다가옵니다.
"죽은 후 나의 눈을 동해에 걸어두라, 너희 나라가 망하는 것을 내 눈으로 똑똑히 보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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