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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시민의 역사 읽기 |
백승종(역사학자, 서강대 명예교수)
어느 인터넷 백과사전에서 “원균” 항목을 읽었다. 고소설 <흥부전>이 절로 필자의 뇌리에 떠오른다. 알다시피 착한 흥부의 모습을 도드라지게 만든 것은 놀부였다. 사람은 누구나 오장 육부가 달렸다는데, 작품 가운데 놀부는 심술보라는 기관이 하나 더 달렸다고 한다. 그래서겠으나 놀부는 사사건건 동생 흥부를 못살게 굴고 박해하였는 이야기고, 그럴수록 빛나는 것이 바로 흥부의 착한 마음씨였다.
한국인이면 누구나 다 아는 <콩쥐 팥쥐>도 구성면에서는 <흥부전>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콩쥐의 어질고 착한 심성은, 그와는 모든 것이 정반대인 팥쥐라는 인물의 언행으로 말미암아 선명하게 드러났다. 이런 방식의 서사를 우리는 권선징악(勸善懲惡)의 소설이라고 한다.
조선 시대는 도덕을 강조하는 유교(儒敎)의 전성기였다. 그 시절에는 착함을 권장하고 악을 다스리는 유교적 서사가 유행하였다. 문학이든 역사든 거의 모든 이야기가 선과 악의 극명한 대조라고 하는 “프레임”에 갇혔다. 그 여파가 오늘에도 인터넷 백과사전을 통해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놀부 프레임의 문제 역사적 인물 원균은 바로 그런 “프레임”에 갇혔다. 사람들이 이순신의 애국심과 용기를 강조하고, 이순신이 평생에 단 한 번도 진 적이 없다는 백전불패(百戰不敗)의 신화의 주인공임을 주장할 때마다 원균에게는 악역이 주어졌다. 이순신의 이름이 빛날질수록 원균은 어리석고 비겁하며, 욕심 많고 간교하다는 부정적 이미지가 만들어졌다. 그야말로 전형적인 흑백 논리인 셈으로, 이는 시간이 흐를수록 강화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유교적 덕성을 온 몸으로 구현한 민족적 영웅이 출현하기를 갈망하는 분위기가 짙었다. 왜란에 이어 두 차례 호란까지 겪었기 때문에 원수를 갚으려고 애쓰던 인조와 효종 때도 그러했다. 또, 역모 사건이 빈번히 일어나는 바람에 충신이란 존재가 어느 때보다 소중하게 느껴지던 영조와 정조 때도 영웅에 대한 갈망이 컸다. 정조가 이순신의 문집인 <<이충무공전서>>를 편찬하도록 지시한 배경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그 덕분에 이순신의 <난중일기>까지 활자화되었는데, 그 이후로 원균이라면 사람들은 고소설에 등장하는 놀부나 팥쥐를 떠올렸다. 다시 한 세기가 흘러 19세기 말이 되자 조선은 외세의 침략으로 큰 위기에 빠졌고, 사람들은 충신 이순신에 관해 깊은 향수를 느꼈다. 사회 분위기가 그렇게 흐를수록 원균에 대한 대중의 혐오는 깊어졌다. ‘악인 원균’은 역사의 진실로 잘못 알려졌고, 그 흔적이 인터넷 백과사전 가운데 아직도 뚜렷이 남아 있다.
고개 드는 의문 정말 원균은 구제불능의 악인이요, 무능력자였을까? 지금까지 제1부에서 제4부까지 서술한 것처럼 역사의 진실은 사회적 통념과는 달랐다. 임진왜란의 수많은 전쟁터에서 원균과 이순신은 그밖에 여러 장수와 함께 협력하여 나라를 위해 싸웠고, 많은 공을 세웠다. 조정에서는 특히 원균과 이순신 두 장수의 어깨에 나라의 운명이 달렸다고 믿었다. 두 사람 사이에 불화가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전쟁터에 나간 장수들이란 으레 그런 사시였다. 조선에 파견된 명나라의 장수들끼리도 마찰이 심각하였고, 침략군인 일본군 진영에서도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는 노골적으로 대립하였다. 전투 중에 장수들은 서로 협력하면서도 대립하는 것이 보편적인 일이다. 조정에서는 원균과 이순신이 서로 불편한 사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으나, 그 두 장수를 제외하면 수군을 맡길 유능한 장수가 없다는 점에 의견이 일치하였다. 원균과 이순신은 누구나 인정하는 16세기 조선 최고의 명장이었다. 그랬기에, 삼도수군통제사란 높은 자리도 이순신이 아니면 원균이 맡아야 했다. 제3의 가능성 같은 것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명백한 역사의 진실이다.
마침내 길고 긴 일본의 침략전쟁이 끝난 다음에도 조정의 논의는, 전란 중에 수군의 역할이 컸고, 수군을 대표하는 장수라면 당연히 원균과 이순신 두 명이라고 했다. 원균이 최후에는 적에게 패배하였다고 하지만 그 때문에 그를 공신으로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주장은 없었다. 패전의 문제를 거론한 대신조차도 원균은 2등 공신이 되기에 무난하다고 말할 정도였다.
가짜뉴스에 침몰한 역사의 진실 그런데 왜, 일부 인터넷 백과사전은 원균에 관해 이토록 적대적인가. 그것은 그의 사후에 등장한 수많은 가짜뉴스 때문이다. 이순신과 원균을 선악 이분법으로 재단하는 낡은 관념이 빚어낸 허구적 기록에서 우리 스스로를 해방시켜야 한다는 뜻이다. 아직까지도 많은 이순신 옹호론자는, 원균이 살아나면 이순신이 죽기라도 하는 것처럼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법은 없다. 역사적 인물의 공과를 둘러싸고 편싸움을 할 일이 아니라, 역사의 진실을 회복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지난 400년 동안 우리사회는 원균의 일생에 관해 수많은 가짜뉴스를 생산해 왔다. 오늘날 시민들이 손쉽게 이용하는 인터넷 백과사전 가운데는 문제의 가짜뉴스를 바탕으로 역사적 진실을 외면한 주장이 넘쳐난다. 그런 가짜뉴스를 일일이 소개하고 반박하기란 여간 귀찮고 성가신 일이 아니지만, 시민들에게 원균의 역사적 진실을 전하고 싶은 사람으로서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일이다.
가짜뉴스의 일례 가짜뉴스의 예를 들어보겠다. 원균이 무과시험에 부정한 방법으로 합격했다가 취소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연전에 인터넷 백과사전 <나무 위키>의 “원균” 항목에 그런 설명이 있었다. 시간이 흐르자 그런 거짓말이 널리 퍼져 역사적 사실처럼 간주되는 형편이다. “원균은 아버지 원준량의 입김 덕분에 무과에서 부정으로 급제했다는 의혹이 있다. ” 가령 <오마이뉴스>에도 이러한 언급이 있다. (2024년 11월 4일 오전 10시 검색)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 위와 같은 서술은 역사적 사실을 왜곡한 것이다. <<실록>>을 살펴보면, 명종 19년(1564) 6월 21일에 의정부 사인(舍人, 정4품) 최옹(崔?)이 “삼공”(삼정승)을 대신하여 다음과 같이 국왕에게 아뢰었다.
“함경북도 병사 곽흘(郭屹), 평안 병사 이택(李澤), 경상우도 병사 원준량(元俊良)이 그들의 자제(子弟)를 무과(武科) 초시(初試)에 응시하도록 허락하였으므로, 지금 그 일을 추고(推考) 중에 있습니다.
신들이 듣건대, 과거 사목(科擧事目)이 문과는 상세합니다. 그러나 무과는 일정한 규정을 세우지 않은 까닭에, 자제들이 (부형의) 군관(軍官)으로서 옛날 관습에 따라 응시하도록 허락하였던 것입니다.
(이번에 문제가 된 사안은) 법을 어기고 거짓으로 응시한 것과는 비할 바가 아닙니다. 상(명종)께서 참작하여 처리함이 어떻겠습니까?” <<실록>>, 명종 19년(1564) 6월 21일. 무과에 응시하는 규정이 세밀하지 않아 각도의 병마사 자제들이 부형이 주관하는 무과초시에 응시한 것이었다. 최옹의 보고를 받은 명종은 다른 명령을 하지 않고, “알겠다”라고 짧게 대답하였다.
위에 소개한 <<실록>>의 기사를 분석하면 다음의 네 가지 설명이 가능하다. 첫째, 자제의 무과 응시자격 시비에 걸린 것은 3명의 병마사였다는 점이다. 함경북도 병마사 곽흘, 평안도 병마사 이택 그리고 경상우도 병마사 원준량이었다. 그들을 상대로 조정에서는 “추고(推考)”하는 중이라고 하였다. “추고”란 가벼운 잘못에 관해 문서를 통해 자신의 태도와 입장을 소명하는 절차를 가리킨다. 그들 병마사 가운데 원균의 아버지 원준량이 포함되어 있었다. 병마사 또는 병사라면 무관으로서는 가장 유능한 인물들이었다. 그들의 자제(子弟)에게 무과(武科) 초시(初試)에 응시하도록 허락했다는 이유로 조정의 추궁을 받은 것이었다. 알다시피 무과도 문과와 마찬가지로 정규시험에 해당하는 식년시에는 1차부터 3차까지 시험이 있었다. 1차 시험인 “초시”는 지역별로 시행하였고, 병마사가 해당 지역의 고시 책임자였다. 그런데 원준량, 이택 그리고 곽흘이 “자제”, 즉 아들과 조카 등 손아래 친족이 시험을 보게 하였다. 그것이 조정의 쟁점으로 떠올랐다는 것인데, 그 당시에는 무과에 합격한 것이 아니라, 1차 시험이 겨우 완료된 상황이었다. “자제”라면 꼭 아들이라고 한정하기도 어려우므로, 그때 시험에 응시한 이가 아들이었는지 조카였는지도 불분명한 상황이다. 그런데도 위의 기사를 토대로 원균이 부정합격했다가 떨어졌다고 주장한다면 무리한 일이다. 둘째, 원준량 등 병마사들은 과거시험에서 부정행위를 저지른 것일까, 하는 문제도 살펴봐야 한다. 문과 시험이었다면 시험에 응시하게 한 것만으로도 불법이 된다. <<실록>>에서, “과거 사목(科擧事目)이 문과는 상세합니다. ”라고 말한 뜻이 그 점에 있다. 그러나 무과는 경우가 달랐다. 그동안 누구도 문제 삼지 않았던 하나의 관행이었다. “무과는 일정한 규정을 세우지 않은 까닭에, 그 자제들이 군관(軍官)으로서 옛날 관습에 따라서 응시하게 허락한 것입니다. ” 최옹의 이와 같은 해명에서 보듯 원준량 등에게는 딱히 위법한 사실이 없었다. 셋째, 의정부의 3대신, 즉 영의정과 좌의정 및 우의정이 보기에 원준량 등 병마사들을 문책하는 것은, 법을 잘못 적용한 일이었다. 그래서 정승들은 의정부의 실무 관리 최옹을 통해 명종에게 원준량 등이 무죄라는 사실을 애써 강조하였다. “법을 어기고 거짓으로 응시한 것과는 비할 바가 아닙니다. ” 의정부에서 보기에는 심각한 문제가 전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럼 이후에 병마사와 같은 지역 사령관의 자제들이 현지에서 무과에 응시하는 것은 금지되었을까? 훗날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로서 한산도에서 무과별시를 주관하였다. 그때도 누구나 아는 바지만 이순신의 자제들이 대거 무과에 응시해 합격의 영예를 누렸다. 인터넷 백과사전의 편집자는 그런 사실도 몰랐거나, 알고 있으면서도 원균을 헐뜯는데 열중한 나머지 왜곡을 일삼은 것으로 보인다.
넷째, 삼정승의 건의 사항을 전해들은 명종의 태도가 당연히 궁금한 내용이다. 왕은 당연히 그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사건 자체를 없었던 일로 처리하였다. “알겠다!”라고 간단히 대답함으로써 이 사건은 종결되었다고 볼 수 있다. 요컨대 인터넷 백과사전에서는 원균과 그 아버지 원준량이 대단한 부정사건을 저지른 것처럼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였다. 그런 줄도 모르고 많은 시민이 그런 기사를 무책임하게 전파하며, 원균의 이미지를 부정적인 것으로 조작하는 데 이바지하고 있다. 원균은 그 해에 무과에 부정으로 합격한 사실도 없고, 더구나 합격이 취소된 적도 없었다. 그가 무과에 합격한 것은 명종 22년(1567)의 일로, 당시 나이는 28세였다.
세 가지 주제 인터넷에 넘쳐나는 가짜뉴스 때문에 일반시민은 역사를 제대로 알기가 어렵다. 역사를 왜곡하는 일은 현대에 갑자기 나타난 현상이 아니다. 까마득한 옛날부터 역사를 왜곡하는 이가 많았다. 우리가 당연한 것으로 믿는 서사 가운데는 일반화가 잘못된 것도 적지 않다. 뒤틀린 사실관계를 해명하기도 하고, 새로운 해석을 통해 우리가 몰랐던 역사상을 만드는 일이야말로 역사가의 사명이다.
원균에 관한 가짜뉴스는 부지기수라고 해도 좋을 정도이다. 그가 순국하고 나서, 즉 17세기부터 해가 갈수록 가짜뉴스가 많아졌다. 이런 일은 이순신을 영웅화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것이다. 아래에서 필자는 조선 시대에 구체적으로 어떠한 가짜뉴스가 있었는지를 간단히 소개할 것이다. 그것도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으므로, 본문에서는 백호 윤휴가 서술한 이순신에 관한 한 편의 글에 국한한다. (제1장) 우리가 굳이 과거에 생산된 가짜뉴스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것이 현대의 가짜뉴스에 깊은 영향을 주고 있어서다. 여기서는 인터넷 백과사전에 버젓이 실린 원균에 관한 가장 대표적인 가짜뉴스에 주목하겠다. 무슨 문제가 어떠한 방식으로 서술되어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분석하겠다. (제2장) 제5부의 마지막 장에서는 필자가 현재 수준에서 일반시민에게 제공할 수 있는 내용은 어떠한 것인지를 시범적으로 서술하겠다. 이러한 문제의식의 저변에는 <나무 위키>와 같은 인터넷 백과사전에서 원균의 역사적 진실을 심하게 왜곡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시정하려는 의지가 작용하고 있다. 원균의 생애를 시민의 눈높이에 맞게 서술한 것인데 시민은 전문적인 연구자가 아니므로, 그 설명이 평이하고 간단하게 되도록 노력했다. (제3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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