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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합의’가 깨졌을 때 -21세기의 동학운동을 구상하며 |
백승종(역사학자)
답답한 현실 ― 역사에 묻노라 올해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난 지 130주년이다. 그 시절 여러 지역에서 수십만 명의 동학농민이 떨쳐 일어났는데, 온순하기만 하던 그들이 손에 무기까지 쥐고 항거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조선사회의 미덕인 상호부조라는 ‘사회적 합의’가 깨졌기 때문이라고 본다. 동학농민혁명을 일으킨 우리 조상들은 농민이었고, 구체적으로는 소농들이었다. 그들은 혁명을 일으켰으나 포악한 지배층을 상대로 개인적인 복수를 하지 않았다. 대신 혁명 기간 내내 소농들은 유무상자(有無相資)를 실천함으로써 무언중에 새로운 세상을 제안하였다. 즉, 재산이 넉넉한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이 서로 돕고 사는 세상을 만들고 있었다는 말이다.
동학농민의 꿈을 ‘유무상자’라는 네 글자로 요약하면 오해가 생길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그것을 통해서 세상에 만연한 착취와 배제, 차별과 모욕이라는 구악을 청산한 것은 사실이었다. 혁명의 주체였던 소농들이 착취자에 대한 원망을 풀고 상생하는 새 세상을 만들고자 했으니, 그것은 곧 ‘해원상생(解寃相生)’의 새 길이었다.
지난 130년 동안 우리 시민들은 울퉁불퉁하고 험난한 역사의 길을 달려왔다. 외세의 개입으로 분단된 국토를 다시 하나로 만들지는 못할망정, 산업화와 민주화를 통해 누구나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 수 있기를 바랐다. 혹자는 마치 한두 사람의 정치가 덕택에 산업화가 이뤄지고, 한 줌의 민주투사들이 있어 자유와 인권이 보장된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산업화와 민주화는 대다수 시민이 진심으로 소망한 것이었으며, 그런 염원은 오늘날 겉으로나마 이뤄질 수 있었다. 산업화를 통해 ‘경제성장’만 하면 많은 문제가 저절로 풀릴 줄 알았다. 그러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고, 시간이 흐를수록 여러 심각한 문제가 새로 생겼다. 억압적인 정치·사회적 구조가 탄생하고, 생존을 위협하는 생태·환경 문제가 등장했다. 자본주의사회의 병폐가 나날이 깊어진 것이다.
그런 현상이 우리 사회에서만 관찰되는 것은 아니다. 이른바 선진국의 공통적 문제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유독 한국에서는 기성의 체제로 도저히 풀 수 없는 사안이 되었다는 점에, 우리의 고민이 있다. 오늘날 집권세력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은 폭발하기 직전이다. 또한번의 ‘동학농민운동’이 펼쳐져야 할 조건이 무르익어가고 있다.
소소한 역사가인 필자가 궁지에 빠진 세상을 구할 방도를 감히 어떻게 제시할 수 있겠는가. 그저 역사의 거울에 비추어 우리 시대의 문제를 대강 어림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역사에 현실 문제를 물어보는 심정으로, 오늘날의 꽉 막힌 정치·경제·사회적 상황에 동학사상과 동학농민운동이 어떠한 돌파구를 시사하는지를 헤아려보려고 한다.
‘사회적 합의’가 깨졌다 알다시피 동학은 1860년(철종 11년)에 탄생했다. 그러고는 한 세대가 지난 1894년(고종 31년)에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다. 소농들이 들고일어난 가장 큰 이유는, 오랫동안 암묵적으로 유지되어온 ‘사회적 합의’가 깨졌기 때문이다. 사회적 합의란 ‘사회계약’과 같은 말이다. 사회 구성원들이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모종의 암묵적인 합의를 체결한다는 뜻이다. 예컨대 개인이 자신의 자유를 희생해서라도 국가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서양에서는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토머스 홉스, 존 로크, 장 자크 루소 등이 사회계약에 관한 이론을 발전시켰다. 이른바 사회계약설을 통해 그들은 정부의 기원을 밝히고, 시민의 의무를 널리 계몽하였다.
어느 사회든지 사회계약 또는 ‘사회적 합의’가 존재한다. 그럼, 우리가 주목할 조선의 ‘사회적 합의’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신분과 재산상에 차이가 있더라도 사회·경제적으로 위기가 닥치면 가진 사람이 없는 사람을 구제한다는 약속이었다. 그래서 흉년이 들면 부자는 창고 문을 활짝 열었다. 가령 9대 진사요 12대 만석꾼으로 알려진 경주 교동의 경주최씨 집안은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는 것을 자신들의 책무로 삼았다.
알고 보면 방방곡곡 어디든지 그들과 비슷한 부자들이 살았다. 정조 때부터 전라남도 구례군에는 운조루(雲鳥樓)라는 99칸의 부잣집이 있었다. 주인 문화류씨는 대대로 쌀뒤주를 집 밖에 내놓고, ‘?타인능해(他人能解)’를 실천하였다. 외부인이라도 필요하면 그 뒤주를 열어 식량을 가져가도록 허용한 것이다.
모든 양반 지주가 위의 경주최씨나 문화류씨처럼 이웃을 구제하는 데 열심이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18세기까지도 흉년이 들기만 하면 조선의 부자들은 가난한 이웃을 돕는 일에 기꺼이 앞장섰다. 가난한 마을사람들, 즉 소농은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부유한 양반의 선행을 칭찬하고 존경하였다. 세상에는 온갖 어려움이 중첩되기 마련이었으나, 18세기까지 조선에서는 흉악 범죄가 자주 일어나지 않았다. 다른 나라에서는 빈번하게 발생했던 민란 같은 것도 이 땅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수형(受刑)시설인 대형 감옥이 건축된 적도 없고, 변호사와 같은 직업적 법률가가 등장할 여지도 없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상업화가 진행되자 사회 분위기가 점차 달라졌다. 더구나 19세기 말에는 쌀과 콩 같은 곡식이 일본으로 수출되기 시작해, 부자들은 곡식을 돈으로 바꿔 더 큰 부자가 될 기회를 얻었다. 그러자 소농의 처지는 더욱더 곤란해졌다. 제아무리 땀 흘려 일해도 식구들이 먹을 식량을 마련할 방법이 하나도 없었다. 지주에게서 식량을 빌려 먹기조차 어려워지자, 소농과 지주의 관계는 급속도로 나빠졌다. 결과적으로, 1894년에 하필 이 나라 제일의 곡창지대인 전라도에서 가난한 소농이 동학농민혁명을 일으켰다. 그곳은 일본으로 빠져나간 우리 쌀의 주산지였으므로, 소농들이 일으킨 혁명의 발화점 또는 진원지가 되었다.
‘주식회사 대한민국’의 끔찍한 모습 오늘날 우리 사회는 어떠한 모습인가. 한때는 ‘주식회사 대한민국’이라는 표현이 사람들의 공감을 샀고, 우리의 집단적 자부심을 표현하는 낱말이기도 하였다. 이 나라는 한 개의 커다란 주식회사와도 같다는 뜻이었다. 요컨대 재벌기업이 이익을 많이 얻으면 모든 시민이 그 이익을 공유할 것이라는 사회적 기대가 그 말의 저변에 깔려 있었다. 필자가 오랜 기억을 더듬어보았더니, 1980년대 초반에는 〈타임〉의 표지에 ‘주식회사 한국(Korea Inc.)’이란 제목이 크게 쓰인 적도 있었다. 자신은 비록 늙고 가난한 시민일지라도 재벌기업인 삼성과 현대 등이 불황에 시달리면 마치 자신의 집안일처럼 걱정하는 사람이 많았던 시절이었다. 그런 마음이 오죽이나 컸으면, 1997년에 외환위기를 당하자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금 모으기’ 운동을 벌였겠는가. 가난한 시민이 국가채무를 청산하기 위해 결혼반지까지 내어놓다니 외국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우리 시민들은 국가 대표급 재벌기업에 대한 신뢰와 기대 그리고 충성을 애국심의 또다른 표현이라 여겼다. 하지만 시민들이 대기업의 경영에 어떤 식으로든 참여할 방법은 없었다. 사실 시민들은 일주일에도 50시간 이상 노동에 시달려, 나이가 들면 자연히 근골격계 질환이나 신경질환을 앓기 마련이었다. 정확히 말해, 시민의 일평생은 피곤한 노동자 또는 가난한 월급쟁이의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 사정은 변하지 않았다. ‘주식회사 대한민국’의 알짜배기 주인은 처음부터 따로 있었다. 재벌기업의 대주주와 임원, 고위공무원, 의사와 법률가, 국회의원 등이야말로 그들이었다. 학연과 지연 그리고 혼맥으로 얽힌 그들은 우리 사회에서 하나의 배타적인 집단을 구성해,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데만 열중했다. 그런 사람들 가운데는 시민을 ‘개돼지’라고 부른 고위공무원도 있었다. 기업의 생태계를 살펴보아도, 대기업과 하도급 중소기업으로 계층화되었다. 또, 기업의 내부 구조를 보면, 다시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이원화되어 있다. 재벌은 극소수의 필수 인력만 직접 고용한다. 노동자는 대체로 하도급자 역할을 하는 영세업체에 소속되어 열악한 노동조건을 거절할 수 없다. 그나마도 비정규직이거나 ‘알바’ 자리에 그치는 것이 대부분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에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다. 정규직이 아닌 노동자는 생계유지와 자녀의 교육에 필수적인 사회적 서비스도 제대로 누리지 못한다. 국민연금 등 사회적 임금을 지급한다고 해도 조건이 까다로워 노후생활이 충분히 보장될 수 없다. 퇴직 이후에도 많은 시민은 어떤 식으로든 노동을 계속한다. 비정규직 노동자 또는 월급쟁이는 인간답게 먹고살 수 없다. 그래도 도시의 비정규직 노동자는 시골에 사는 농어민에 비하면 처지가 훨씬 낫다. 농민과 어민에게는 일정한 수입이란 것 자체가 보장되지 않는다. 그들은 감히 생산원가를 요구할 권리도 없다. 시장의 원리라는 것이 그들에게는 불리하게만 작동한다. 가령 양파의 가격이 오르면 수입 물량이 쏟아져 농민의 호주머니는 얇아진다. 그러나 농사가 잘되어 양파 값이 폭락하면 생산비조차 회수하지 못한다. 이처럼 말도 안되는 억울한 일이 해마다 되풀이되므로, 농어촌에는 나날이 빈집만 늘어간다. 이른바 ‘지방소멸’과 ‘노령화’는 이제 필연적인 추세가 되었다. 요컨대 ‘과잉산업화’ 속에서 한국은 무역강대국으로 성장했으나, 그 열매는 재벌기업이 몽땅 차지해버린 꼴이다. 올해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이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2022년을 기준으로 5대 재벌의 총자산은 1,324조 8,000억 원으로 국내총생산(GDP)의 61%였다. 과거 2007년만 해도 그들의 총자산은 350조 2,000억 원으로, 당시 GDP의 32%였다. 말을 바꾸면, 지난 15년 사이에 5대 재벌의 자산은 약 4배 증가했고, GDP에서 차지하는 비율도 배로 늘어났다. 또, 5대 재벌기업 중에서 토지자산을 가장 많이 보유한 회사는 현대자동차로 무려 26조 원을 자랑한다. 그 뒤를 롯데, 삼성, SK가 따라가고 있다. 위에 제시한 몇 가지 수치만 얼핏 보아도 알 수 있듯, 모든 재물은 몇 명에 지나지 않는 재벌가의 수중에 집중되어 있다.
소수가 온통 재물을 독점하고 있으므로, 평범한 시민의 살림은 빚만 늘어나는 형편이다. 2022년 5월 현재 한국은행이 발표한 바에 따르면, 2021년 말 한국의 가계부채는 1,862조 1,000억 원으로 한 해 전보다 7.8?%(136조 원)가 증가했다. 그보다 5년 전인 2016년에 비해 519조 6,000억 원이나 늘어난 것이다. 5년간 연평균 100조 원 이상으로 가계부채가 많아졌다는 뜻이다. 통계청의 발표를 인용하면, 2023년 현재 가구당 평균 부채는 무려 9,186만 원이다. 그중 금융부채가 6,694만 원이나 된다.
일반적으로 경제가 성장하면 가계부채는 자연스럽게 증가한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증가 속도 역시 큰 문제이다. 2020년부터 가계부채는 GDP보다 더 많아졌다. 2021년에는 가계부채가 GDP보다 6% 이상 많은 것으로 집계되었다. 2016년부터 5년 사이에 그 비율은 18.8%나 올랐다. 이러한 증가 속도 및 비율은 세계 어디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 한국의 가계부채라고 한다. 전문가들의 진단이 모두 그와 같다. 만약에 세계경제가 큰 폭으로 침체하면 우리는 가계부채 때문에 극심한 고통에 빠질 수 있다는 점은 누구나 짐작하는 바이다. 그런데 이 사회가 당면한 문제가 어디 가계부채 하나이겠는가. 소득의 양극화가 심하게 일어났고, 쓸 만한 일자리는 극소수의 몫이 되었다. 살기 힘들어진 사람들이 급증하자 누구도 원하지 않는 자살에 내몰린 이가 많아졌다. 결혼과 출산을 포기한 젊은이도 부지기수이다. 해마다 인구가 큰 폭으로 줄어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민주화라는 것도 열매가 씁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시민이 피땀 흘려 싸운 결과 군부독재를 청산하고, 인권을 보장하는 법적 장치가 마련된 것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오늘날의 정치는 만성적인 악덕에 빠져 있다고 볼 수 있다. 해묵은 이념 논쟁에 낡은 지역감정을 이용한 표몰이로 정권의 행방이 결정되는 한심한 작태가 되풀이되고 있다.
또, 무소불위의 대통령제에 기생하여 몸집을 키운 특수 검찰이 폭정의 주체로 등장하는 일도 벌어졌다. 사회적 공기(公器)라는 언론매체는 그 사명을 버리고, 사리사욕을 취하기 위해 가짜뉴스를 생산하는 데 전념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시민은 도무지 진실을 알 수 없어 몇몇 유튜브 채널에 의존하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과도한 중앙집권을 지양하고, 지방에 권한을 넘겨주어 주민자치의 시대를 열겠다는 약속, 집권세력은 항상 그 말을 반복해왔으나 세상은 그와 정반대로 돌아간다. 선거제도는 기존의 양당제를 옹호하는 수단으로 악용되며, 시민의 정당한 정치참여를 외려 법이 제한하고 있다. 이런 여러가지 일이 벌어지는 사이에, 시민이면 누구나 정당하게 누릴 수 있는 권리와 혜택도 수도권에만 집중되어, ‘지역소멸’이란 표현이 마치 당연한 귀결처럼 되었다.
한마디로, 오늘의 한국사회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및 국제관계까지 어느 것 하나도 안심할 수 없는 지경이다. 총체적 파탄에 직면해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주식회사 대한민국’의 사회적 합의가 이미 깨졌기 때문에, 1894년에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을 때와 다름이 없다. 사회적 합의가 깨졌으니, 시민이 성난 노도처럼 포효할 것은 정해진 순서이다.
동학에서 배우는 오래된 미래 필자는 여러 해 동안 동학을 사상적으로 연구하고 동학농민혁명의 여러 지도자가 꿈꾸고 실천한 바를 알아보았다. 그 결과를 짧게 요약하면 다음의 다섯 가지이다.
첫째, 정치적인 측면인데 시민의 의사를 함부로 무시하거나 왜곡하는 국가는 용납할 수 없다는 점이다. 만약 조선왕조가 억울한 소농의 호소를 진지하게 받아들였다면 ‘제폭구민(除暴救民, 폭정을 없애 백성을 구한다)’을 위해 궐기할 필요가 어디 있었겠는가. 오늘날 우리는 민주주의를 표방한 ‘대의정치’의 폐해에 시달린다. 자본이 거대정당을 사실상 휘하에 거느리며 시민의 꿈과 소망을 외면하는 식이다. 만약 우리가 전봉준과 손화중 등이 이끈 동학농민혁명의 가르침을 존중한다면, 소농이 중심이 되었던 집강소(執綱所)가 그랬듯이 직접민주주의의 기능을 대폭 강화해야겠다.
둘째, 경제적으로도 동학농민혁명이 주는 가르침이 적지 않아 보인다. 현대사회는 화폐 중심의 신용경제를 절대적인 것으로 신봉하고, 대규모 산업만을 과잉 발달시키는 데 혈안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양극화와 자본집중을 불러일으켜 민생에는 도리어 큰 피해를 준다. 더구나 우리에게 익숙한 제국주의적 무역거래는 소수의 강대국의 편에서는 유익하더라도, 대다수 약소국의 처지에서는 영원한 빈곤의 원인이 될 뿐이다. 만약 우리에게 그런 깨달음과 성찰이 있다면, ‘유무상자(有無相資)’하는 것이 삶의 원칙이라는 동학의 가르침을 존중하는 것이 옳겠다.
셋째, 사회적으로도 우리가 반드시 고쳐야 할 점이 적지 않다. 현대사회는 인권과 자유를 표방하면서도 속으로는 억압과 배제와 혐오의 악습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우애와 화해를 추구한 동학농민의 공동체를 현실 속에서 재현하면 문제가 풀릴 수 있을 것이다. 소규모의 공동체를 중심으로 사회생활을 다시 가꾸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동학농민의 ‘포(包)’와 ‘접(接)’이 생산공동체이자 오락공동체인 ‘두레’에 토대를 두었듯, 우리도 일상생활 속에서 배움과 나눔이 있는 우정의 공동체를 만들기에 힘쓰면 좋을 것이다.
넷째, 문화적으로도 동학농민혁명은 우리가 개선할 점이 무엇인지를 강력히 시사한다. 지식이란 고작해야 돈벌이의 수단일 뿐이나 본래는 좋은 세상을 만드는 데에 필요한 것이었다. 동학의 큰 스승들은 모두 특권의식이 없는 ‘평민지식인’들이었다. 그들은 낡고 불합리한 위계적이고 차별적인 관계를 없애려고 노력하였다. ‘광제창생(廣濟蒼生, 널리 백성을 구한다)’하려고 ‘관계의 질적 전환’을 몸소 실천하였다.
특히 해월 최시형은 삼경(三敬)을 강조하며 경천(敬天), 경인(敬人) 그리고 경물(敬物)을 강조했다. 특히 사람들이 홀대한 여러 사물에 대하여 그는 ‘이천식천(以天食天, 우리는 사람이나 우리가 먹는 것도 하늘임)’이라고 설파하였다. 인간의 사고를 지배하는 자아 중심에서 벗어나 모든 사물이 평등한 관계임을 깨우친 것이다. 만약 최시형의 사상을 존중한다면 우리는 생태 중심의 문화를 건설하는 것이 마땅하겠다.
끝으로, 동학농민의 시선으로 국제관계를 바라본다면 다른 나라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 역시 달라질 것이 빤하다. 이른바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는 흉악한 강대국을 꺾고 정의를 구현하자는 것이었다. 즉, 위도 아래도 없이 호혜 평등한 국제사회를 건설하려는 뜻을 담은 말이다. 그 점을 명심한다면, 강대국이 자국 중심으로 편성한 전쟁공동체는 반드시 사라져야 할 역사의 짐이다. 오늘날 한반도의 평화와 재통일이 이처럼 어려운 것도 따지고 보면 우리나라나 북한이 블록 중심의 사고에 아직 얽매여 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130년 전 먼 옛날의 일이었다. 동학농민이 그들의 지도자인 평민지식인들과 함께 피땀 흘려 이룩하고자 한 ‘보국안민(輔國安民, 나랏일을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함)’의 꿈은 아직도 우리의 가슴속에 살아 숨 쉰다. 선조가 후세에 물려준 ‘미래가치’를 깊이 성찰한다면 어둠을 물리치고 새 세상을 만드는 작업이 불가능한 일만도 아닐 것이다. 당장에는 우리의 현실적 여건과 고정관념에 배치되어 어리둥절할 사람도 많을 테지만, 조상이 닦아놓은 길을 오늘에 되살리지 못할 이유는 없다. ‘법고창신(法古創新, 옛것을 본받아 새것을 지음)’은 우리의 당연한 책무요 또한 권리이다. 그런데 동학과 동학농민혁명을 떠올릴 때마다 필자의 마음을 강하게 사로잡는 것은 바로 소농들의 독창적인 사회적 상상력이요, 생각의 전환을 실천에 옮긴 그들의 실천의지였다. 21세기의 우리에게도 상상력과 굳은 실천의지가 절실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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