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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역사의 순리를 거부하는가? |
백승종(역사학자,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중종 14년 11월 15일 밤, 갑자기 대궐 안이 시끄러웠다. 숙직하던 승지 윤자임이 허둥지둥 나가 보았더니, 영추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근정전에도 불을 밝혔고, 편전 바깥에는 화천군 심정 등이 앉아 있었다. 승지들 몰래 중종이 대신을 불러들인 것이었다. 왕은 대사헌 조광조와 그의 동료들을 잡아들이라고 명하였다.(실록)
조광조 등은 영문도 모른 채 옥에 갇혔다. 사흘 뒤 누군가는 이 사건의 실체를 조사해 이미 귀양길에 오른 조광조에게 일렀다. 그에 따르면, 남곤과 홍경주 및 심정은 흉흉한 예언설로 중종을 불안에 빠뜨렸고, 사건 당일 밤 신무문을 통해 궐내에 들어와 중종과 함께 거사계획을 논의하였다. 그런 다음 그들은 궐 밖으로 나왔다가 연추문으로 다시 들어가서 조광조 등을 대역죄로 고발하였다. (실록, 중종 14년 11월 18일) 그 날 대신들이 신무문으로 들어왔다는 기록이 많으나 사실은 영추문이었다. 역사의 진실은?
중종은 조광조 등을 처형하라고 명하였다. 그러자 영의정 정광필이 가로막았다. 임금의 지지를 받아 개혁을 꾀한 것인데 어떻게 사형 죄가 성립하느냐는 반론이었다. 머쓱해진 중종은 대신들이 조광조 일파의 처벌을 요청하였다고 변명하였다. 그러자 정광필은 임금이 대신들에게 그런 주문을 하였다고 반박하였다.(실록, 중종 14년 11월 16일) 중종은 본래 계획대로 밀고 나갈 생각으로, 의금부에 지시해 조광조 일파를 심문한 보고서(‘추안’)를 올리게 했다. 그에 따르면, 조광조는 오직 임금님의 마음을 믿고, 사익을 함부로 추구하는 병통을 뿌리 뽑을 생각이었다고 진술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심문 현장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훗날 대간이 아뢴 바지만, 조광조는 심문에 응하지 않았다. 만취 상태에서 그는 심문관들을 조롱하였고, 그들이 작성한 보고서에 서명하기를 거부했다. (실록, 중종 14년 12월 9일) 중종이 대신들을 불러 확인한 결과 그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실록에는 조광조 등의 심문 보고서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의금부가 적당히 꾸민 것으로 조작된 문서이다. 기묘사화 대 조정 안팎에는 조광조를 동정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민상안 등 대신 8명은 처벌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심연원 등 20명쯤의 관리도 같은 뜻이었고, 성균관 유생 1백 50여 명은 대궐 안으로 들어와 대성통곡하였다. 이처럼 반대 여론이 거세지자 중종은 한 걸음 물러섰다. 왕은 조광조 등 지도급 인사 4명은 곤장 1백 대를 때려서 귀양 보내고, 나머지 여럿에게는 벌금형과 유배형을 집행하라고 명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정광필은 곤장 형을 시행하기는 곤란하다고 반대하였으나 중종은 고집을 부렸다.(실록, 중종 14년 11월 16일) 역사는 조광조 등이 곤장을 맞고 유배되었다고 기록하였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의금부로 몰려간 군중들이 곤장을 때리지 못하게 막아냈다. 중종 15년 1월 4일, 동지사 이항이 고백한 사실이다.(실록) 자신이 저지른 죄악 순순히 인정하고 각자의 처지대로 죗값 치러야 언제나 후세는 기록을 통해서 과거의 일을 판단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역사기록은 오염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 우리로서는 또 다른 기록에 의지해 진실을 파악한다. 지금 우리 눈앞에 전개되고 있는 정치적 아수라장의 진실도 후세의 역사가는 그렇게 해명할 것이다. 매체에서 연일 쏟아져 나오는 이야기를 들으면 참으로 한심한 생각이 든다. 윤석열은 지금 대통령 자리를 고수하려 들 때가 아니다. 한덕수도 국민의 힘 당직자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즉각 사임하고 석고대죄(席藁待罪)하는 것이 옳다. 그들은 저마다 자신이 저지른 죄악을 순순히 인정하고 각자의 처지대로 죗값을 치러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는커녕 몽니를 부리고 있다. 왜, 역사의 순리(順理)를 거부하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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