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순간 사랑이 가장 필요한 곳, 남태령에 진정 같이 서 있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
김경호(법무법인유앤아이 변호사)
종교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많은 이들이 ‘종교’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 가장 먼저 ‘사랑’ 혹은 ‘자비’와 같은 단어를 이야기한다. 실제로 종교는 인류 역사 속에서 힘없는 자를 돌보고, 위기에 처한 이들을 보듬는 역할을 해왔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사회의 모습은 과연 어떠한가. 종교가 온전히 제 역할을 다하고 있다고 보기에는 의문이 남는다.
“이 땅에 종교의 존재 의미는 사랑이 필요한 곳에 ‘가장 먼저’ ‘가장 강하게’ ‘가장 끝까지’ 사랑을 전하는 것이다. 그 일을 해야 하는 사람이 바로 성직자인 것이다.” 이 말처럼, 종교가 존재하는 이유는 누군가의 상처가 가장 깊고, 그 상처가 눈에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일수록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고 달려가는 데 있다. 신의 이름으로 위로하고 도움을 주는 일을 앞장서서 해야 하는 이들은 바로 성직자들이다.
하지만 정작 대한민국에서 ‘가장 사랑이 필요한 곳’으로 지적되는 남태령에서는 성직자의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오히려 20대, 30대 젊은 여성들이 가장 먼저 현장에 달려가 손을 내밀고 있다고 한다. 목소리를 내야 할 교회나 사찰, 성당의 문턱은 높기만 하고, 그것을 이끌어야 할 성직자들은 어디로 갔는지 궁금해질 뿐이다. 이런 현상은 종교가 본연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분명한 증거다. 입으로만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 사랑이 필요한 곳에서 ‘먼저’ 몸을 던져야 하는 것이 성직자의 소명이다. 종교는 그것을 위해 존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정작 현장에 나가 헌신을 보여주는 이들은, 의외로 20대와 30대의 젊은 시민들이다. 이들은 종교적 직책이나 권위를 갖고 있지 않지만, 오히려 스스로 ‘참된 성직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다양한 ‘남태령’이 존재한다. 남태령이라는 지명이 특정 장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 순간 사랑의 결핍이나 구조적 불평등으로 고통받는 곳들을 상징하기도 한다. 진정한 종교라면, 이런 곳을 찾아 가장 먼저, 가장 강력하게, 가장 끝까지 함께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미사나 예배, 법회 등 의식에 집중하고, 제도나 기득권에 의존하면서 정작 손을 내밀어야 할 곳에선 종교가 보이지 않는다. 의식과 전통에 매몰된 ‘조직 종교’의 한계를 부정하기 어렵다.
성직자란 종교의 이름을 등에 업고 본인의 사명을 공고히 하는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종교의 가치, 즉 사랑과 자비를 가장 절실히 필요한 이들에게 직접 전하고 지켜내는 사람이라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마주하고 있는 현실은 그 반대에 가깝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대한민국 종교의 현실’이자 대중의 마음에서 종교가 점점 멀어지는 이유다.
이제 종교 지도자들은 다시금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야 한다. “과연 나는, 그리고 우리가 섬기는 종교는 이 땅에서 왜 존재하는가? 가장 필요한 곳에 왜 가장 먼저 달려가지 못하고 있는가?” 그럴듯한 말과 근사한 예식은 사랑이 필요한 사람들의 허기를 채워주지 못한다. 진짜 사랑과 봉사는 그곳에 ‘몸으로’ 존재함으로써 시작된다.
더 늦기 전에 대한민국 종교는 초심을 회복해야 한다. 종교가 다시 설득력을 갖고 신뢰를 되찾으려면, 말뿐인 ‘사랑’을 반복하기보다 실제 삶의 현장에서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해야 한다. 누군가는 “젊은 여성들이야말로 참된 성직자다”라고 말한다. 종교인이 아니어도, 그저 연대와 헌신의 정신으로 그들의 삶에 파고드는 이들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종교가 지향해야 할 가장 근본적인 정신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칼럼에서 제기하는 비판은 종교와 성직자 전체를 적으로 돌리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저 종교인이라면, 더 나아가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되새겨봐야 할 질문을 던지고 싶을 뿐이다. 가장 고통받는 자들과 가장 힘든 현장을 외면한다면, ‘종교’라는 이름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아무리 깃발만 높이 들어봤자, 사랑할 대상이 없다면 그 깃발은 의미를 잃는다. 종교는 깃발을 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다시 돌아보고, 사랑이 필요한 곳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참된 성직자의 길이자, 참된 종교의 길이다. 그리고 그 길을 지금 묵묵히 걷고 있는 젊은 이들에게서, 우리는 제대로 된 ‘사랑’의 실천과 ‘종교’의 이상을 엿볼 수 있다. 이미 그들이야말로 한국 사회의 참된 성직자라 할 수 있지 않을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