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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무게 |
정관성(원광대 강사)
12월 29일 아침 9시 3분 제주항공 여객기가 전남 무안공항에서 동체착륙을 시도했고, 탑승객 181명 중 179명이 사망했습니다. 대형 사고를 접할 때마다 희생자들의 인생과 생명이 터무니없이 무너져 내린 걸 보며 허탈하고, 안타깝고, 슬픈 감정이 뒤섞입니다. 한 개인이 아니라 사회 전체와 인류가 공통으로 느끼는 인간에 대한 연민과 공감을 확인하게 됩니다.
인류는 다른 동물이나 자연의 힘에 비해 신체적 역량은 대단하지 않습니다. 빠르지도, 날카롭지도, 날아오르지도, 물속에서 자유롭지도 못합니다. 다만 사회를 이루고 서로 지혜를 짜내고 돕는 능력이 남다른 덕에 현재의 지구의 지배자가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배운 것이 바로 “공감하는 능력”이 아닌가 합니다.
농사일을 마치고 해외여행을 갔던 농민은 우리의 어머니, 아버지, 이웃 친척이었습니다. 팔순을 맞이해서 가족여행을 간 분들은 큰 맘 먹고 여행을 준비했을 겁니다. 효성이 지극한 자식들이 자랑스러웠을 거고요. 택배 물건을 들여 놓으라고 아들에게 카톡을 보낸 엄마는 여행을 마치고 집에 가서 일상을 영위했을 겁니다. 사고 피해자는 대부분 “우리”였습니다. “우리”가 아프고 죽어서 “우리”가 슬퍼하고 아파하는 것입니다.
12월 3일 밤 윤석열은 계엄을 선포했습니다. 군인들이 총을 들고 국회의사당에 진입하여 활보했습니다. 이런저런 변명도 아니고 논리도 없는 거짓말을 여러 차례 지껄였습니다. “계엄은 고도의 통치행위다, 국회를 겁주려 했다, 두 시간짜리 내란이 어디 있느냐, 법과 절차에 따라 당당하게 임하겠다. ..” 등의 말을 믿고 따르는 사람은 여당 국회의원과 20% 미만의 일부 국민에 지나지 않습니다. 최근에는 “총으로 쏴서라도 국회 문을 부수고 의원들을 끄집어내라. 이번에 안 되면 계속 2차, 3차 계엄을 하겠다. ”고 내란을 직접 지휘한 사실까지 밝혀지고 있습니다.
국민들이 치를 떠는 것은 과거 계엄으로 인한 학살과 폭력의 기억 때문입니다. 박정희의 계엄은 여야 정치인을 포함한 많은 학생들을 감옥에 가두는 폭정으로 이어졌습니다. 전두환의 계엄은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학살과 탄압으로 현대사의 비극 중 가장 비극적인 상황을 연출했습니다. 계엄의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은 87년 민주화운동 이후에도 오랜 동안 우리 사회의 과제가 되었습니다. 반성 없던 전두환이 늙어서 죽을 때까지 그는 악의 화신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살인마와 같이 살았던 시절이었습니다. 광주 피해자와 인연이 있든 없든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같이 미워하고 같이 분노했습니다. 광주와 민주화운동 피해자들의 아픔에 공감하며 아주 서서히 아픔을 치유하는 과정이었습니다. 12.3.계엄은 치유의 과정을 역행하는 정서적 반란이기도 합니다.
12.3.계엄에 반대하고 길거리로 나온 젊은이들은 5.18과 유신독재를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책, 영화, 학교 교육에서 독재자들이 행한 짓을 배우고 익혔으며, 현실에서의 부조리와 연결시킬 줄 아는 현명한 세대입니다. 우리 공동체의 기억세포에 전달되는 악행에 대한 저항의 유전자를 이어받았습니다. 탄핵 집회에 가장 아끼는 응원봉을 들고 나오고, 남태령에 막힌 농민들을 위해 새벽잠을 포기하고 같이하는 젊은이들은 사회적 약자와 기꺼이 연대하며 선결재로 음료값을 지불하는 모습은 스스로가 공동체의 주인임을 확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기성세대가 “라떼는 말이지~~”로 말하던 신화의 한쪽을 채우는 수용자가 아닌 “지금 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을 인지한 시대의 주역이 되고자 합니다. 이들의 인식과 경험은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문화적·사회적 유전자가 되어 공동체의 기억과 반성을 이어갈 것입니다. MZ세대의 발랄한 저항이 긍정적인 이유입니다.
대형참사를 겪을 때마다 인간의 무능과 인간의 불완전성을 절감합니다. 하지만 정치적 이해관계를 위해 전쟁을 유도하거나 계엄을 통해 양민을 총칼로 다스리려는 자들을 볼 때마다 인간의 저급함과 이기심을 느낍니다. 어쩔 수 없음에 대한 좌절과 곤혹감을 느낄 때가 있는가 하면, 한편으론 충분히 막을 수 있고 통제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이기적 계책으로 큰 재앙을 불러오는 경우를 봅니다. 죽어가는 사람은 다수의 민중입니다.
특히, 내란과 외환의 경우 위정자의 권력욕에 간신배들의 발호가 더해져 걷잡을 수 없는 환란으로 이어지곤 합니다. 어쩌면 2024년 대한민국은 그 어디쯤에 서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진흙탕으로 빠져드는 수레를 반대쪽에서 잡아끄는 사람들은 오직 민중뿐입니다. 여당은 어떻게 해서든 기득권을 지키고 싶어 하고, 야당은 이번 기회에 다시 권력을 잡고자 할 것입니다. 당장은 민중의 요구와 자신들의 이해가 맞아 거악에 대항해 싸우지만 권력을 잡고 나면 언제나 그랬듯이 민중의 외침을 외면하기 일쑤라는 것도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민중이 끌어올린 수레에 실린 짐에 눈독을 들이는 자들에게 큰 기대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우리”의 안전과 미래는 우리가 지켜가야 할 것입니다. 적어도 인간의 추악함과 이기심으로 빚어질 수 있는 참사는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주항공 희생자는 180명에 이릅니다. 그 원인은 나중에 밝혀지겠지만, 최소한 계획되고 의도한 사고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12월 초 어느 순간 우리는 무고한 생명 1,800명, 18,000명, 18만 명 혹은 180만 명을 잃을 수도 있었습니다. 생명의 무게를 가벼이 여기는 악한과 추종세력 의 계획된 학살을 겨우 막아냈습니다.
“공화국”은 “우리”의 목소리로 “우리”의 힘으로 민주주의를 일구어가야 합니다. “시민의 자기 지배”는 참으로 어려운 숙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누군가 게임을 하듯, 지도에 그림을 그리듯, 문서에 계엄 작전문건을 만들 듯 끼적인 것들로 오랜 동안 쌓은 공화국의 한 축이 휘청거리며 무너질 수도 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공화국의 위기는 우리 생명의 위기와 다르지 않습니다. 차가운 길바닥을 지키던 뜨거운 목소리는 어느 날 초개와 같이 버려질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길거리에 나갑니다. 자신들을 민주(MZ)세대라 부르는 젊은이들과 함께 노래하고 외치며 공감회로의 한쪽이 끊어진 자들에 맞섭니다. 그것이 우리의 “생명의 무게”를 지켜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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