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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일합일론의 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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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역사학자, 서강대 명예교수)
인간은 하늘과 하나가 될 때 이상적인 상태에 도달한다. 이런 뜻을 처음으로 암시한 이는 맹자였다. 그가 ‘천인합일’이란 말을 직접 꺼낸 적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진심(盡心)’, ‘지성(至誠)’, ‘지천(知天)’ 등의 용어를 사용했다. 마음을 다해 하늘의 뜻을 헤아리고, 정성을 지극하게 다하면 하늘도 감동할 것이라는 뜻이었다.
한나라 때가 되면, 인간세상의 일이 하늘과 직결되어있다는 생각이 더욱 뚜렷해졌다. 동중서(董仲舒, 기원전 170-120 추정)의 ‘재이론(災異論)’이 좋은 본보기였다. 사람의 잘잘못에 대해 하늘이 상서와 재앙으로 응답한다. 그가 강조한 점이었다. 동중서는 인간의 성품에 관해 설명할 때도 천성(天性)과 인위(人爲)는 상호보완적이라고 주장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간 이는 송나라의 장횡거(張橫居, 1020-1077, 본명은 載)였다. 역사상 처음으로 ‘천인합일’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으니 말이다. 천도(天道)와 인도(人道)를 장횡거가 동일시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그 둘은 하나가 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성리학자들은 천리(天理)와 인욕(人慾)을 대립적인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렇게 전제하면, 하늘과 인간은 서로 엄격히 분리된 셈이 된다. 그러나 끊임없는 수련을 통해 인욕을 극복한다면, 둘은 하나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이 지배적이었다. 조화롭게 하나를 이루는 것. 이것이 바로 선비가 가야할 길이었다.
후대의 ‘육왕학(陸王學)’에서도 천인합일을 선비의 당연한 임무로 보았다. 송나라의 육구연(陸九淵, 1139-1193, 호는 象山)과 명나라의 왕수인(王守仁, 1472-1528, 호는 陽明)이 대표적이었다. 그들의 학설을 바탕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육왕학이었다.
부분적으로는 육왕학을 수용하면서도, 다분히 비판적이었던 이가 명나라의 나흠순(羅欽順, 1465-1547, 호는 整庵)이었다. 그 역시 천인합일론의 지지자였다. 그는 노수신과 이항(李恒, 1499-1576, 호는 一齋) 등 상당수 조선 선비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나흠순은 절제된 욕망 또는 정당한 욕망은 필연적이라고 주장하는 등, 인간의 욕망이 갖는 순기능을 적극적으로 인정하였다.
조선에도 천인합일설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표한 선비들이 많았다. 유성룡(柳成龍, 1442-1507, 호는 西厓), 신흠(申欽, 1566-1628, 호는 象村), 이현일(李玄逸, 1627-1704, 호는 葛庵), 허전(許傳, 1797-1886, 호는 性齋), 최한기(崔漢綺, 1803-1875, 호는 惠岡) 등이 대표적이었다.
유성룡은 이황의 제자였다. 그는 임진왜란 때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선 심정으로 앞장서 국난을 헤쳐 나갔다. ‘천인합일’에 관한 그의 생각은 다음의 글에 잘 나타나 있다.
“사람은 하늘이 되지 않은 적이 없다. 하늘도 사람이 되지 않은 적이 없다. 위아래가 서로 통하니, 모두 하나의 이치이다. 요(堯)ㆍ순(舜)ㆍ우(禹)ㆍ탕(湯)ㆍ문(文)ㆍ무(武)ㆍ주공(周公)이 위에 있어 천하가 잘 다스려졌다. 이것은 천인합일(天人合一)이 되어서그랬던 것이다. 공자와 맹자는 성현의 덕을 지녔으나, 궁곤하였고 아래 자리에 있었다. 때문에 그 말씀이 실천되지 못하였고, 천하가 그 은택을 입지 못했다. 이것은 천인(天人)이 합일하지 못한 경우였다. (중략)
내가 일찍이 경연(經筵)에 있을 때 임금께서 기수설(氣數說, 천지현상과 세상일을 기수(氣數)로 알아내는 방법)에 관해 물으셨다.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천수(天數)는 춥고 더운 것이요, 인사(人事)는 털옷과 베옷입니다. 춥고 더운 것은 사람의 힘으로 옮기고 바꿀 수 없습니다. 하지만 털옷과 베옷을 갖추면 춥고 더운 것을 막을 수 있어, 추위와 더위에 곤란을 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인이 오로지 인사를 주로 하고 천수를 언급하지 않은 데는 진실로 까닭이 있었습니다.
유성룡의 말에 따르면, 운이 닿아 ‘천인합일’이 되면 태평성세가 이뤄진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의 뜻대로 되는 일이 아니다. 하늘의 뜻을 좌우하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사람이 도리대로 성심껏 노력하면 그래도 악운은 피할 수 있다고 보았다. 유성룡은 어떠한 고난이라도 이를 무릅쓰고도 앞으로 나아가는 용기 있는 선비였다.
‘천인합일’을 진지하게 연구한 선비들은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않았다. 신흠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1628년(인조4)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인조는 예조좌랑 김현(金?, 생졸년 미상)을 보내 신흠의 영전에 제문을 드렸다. 그 일절에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마음을 격탁양청(激濁揚淸, 탁한 이를 물리치고 맑은 이를 북돋움)에 두고(心存激揚) 천인합일(天人合一) 탐구했네(學究天人) 청요직(淸要職, 명예롭고 중요한 관직)을 지냈으나(騫淸翥要) 늘 더더욱 삼갔지요(歷揚愈夤)” 여기서 보듯, ‘천인합일설’은 한낱 미신이 아니었다. 그것은 삼가 우주자연의 이치를 본받아 아름답고 조화로운 세상을 이루고야말겠다는 굳센 의지의 표현이었다.
1690년(숙종16), 이현일은 <<홍범(유교의 정치철학을 담은 경전)>>에 근거해 숙종에게 인욕(人慾)을 끊으라고 간곡히 부탁하였다. 그래야 ‘천인합일’에 도달할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때 이현일은 이렇게 말했다.
“《홍범(洪範)》은 천인합일(天人合一)의 도를 담은 글입니다. 때문에 그 책에서는 감통(感通, 지극한 정성이 하늘을 감동시킨다는 주장)의 이치를 말하였습니다. 《춘추》는 나라를 경영하고 세상을 다스리는 교훈을 밝힌 것입니다. 때문에 사시(四時)의 변화를 가지고 역사를 살폈습니다. 이 어찌 후세의 임금이 감계(鑑戒)로 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 세상의 변고는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인사(人事)로 인하여 감응하는 법입니다. 선유(先儒)가 말하였습니다. ‘《홍범오행전(재이(災異)와 상서(祥瑞)를 기록한 책》은 없앨 수 없다. ’ 참으로 틀림없는 견해입니다. (중략)
나라가 흥하고 쇠하는 기미는 오직 임금이 한번 마음을 바꾸느냐, 않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근자에 하늘이 전하의 마음을 일깨워 경계시키고 분발시키니, 전하께서 스스로 새롭게 하려는 뜻을 세우시면 실로 이 나라에 영원한 복이 될 것입니다. 그럼 사욕을 극복하고 의리로 일을 처리하여 호오(好惡)가 바르게 서고 상벌(賞罰)이 합당해지게 하려고 한다면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마음속으로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을 엄밀하게 구별하십시오. 반드시 인욕(人慾)을 버리고 천리(天理)를 얻고자 노력해야만 합니다. ”(<<갈암집>>, 제3권, <직임을 사양하고 아울러 소회를 진달하는 소>) 이현일은 전형적인 성리학자였다. 그랬기에, 그는 ‘인욕’을 완전히 제거하고 ‘천리’를 따라야만, ‘천인합일’의 길이 열린다고 확신하였다. 반론의 여지가 없지 않았다. 앞서 유성룡이 설파했듯, 공자와 맹자의 인품과 지혜로도 ‘천인합일’은 불가능하였다. 아마 이현일도 유성룡의 견해를 잘 알았을 것이다. 한데도 이렇게 주장한 것은 왤까. 숙종을 권면하여 보다 나은 정치를 펴게 하려는데 뜻을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현일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선비들은 19세기 말까지도 적지 않았다. 1869년(고종 6) 5월 6일, 경연에서 당대의 큰선비 허전, 박호양, 이기호 등도 이현일과 똑같은 입장을 표명했다. 그들은 <<맹자>>의 한 대목, 즉 ‘호연지기(浩然之氣)’설을 ‘천일합일’의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풀이하였다. 그 날짜 <<승정원일기>>를 살펴보자. “허전이 아뢰었다. ‘사람은 천지의 바른 기운을 타고났습니다. 이 기운은 본래 매우 크고 강건하기 때문에, 곧게 기르고 사욕으로 바른 것을 해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 기운이 천지 사이에 충만하게 됩니다. 이것이 이른바 ‘천인합일(天人合一)’입니다. ” (중략) 박호양은 아뢰기를, ‘호연지기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어찌 감히 함부로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까. (중략) 보통사람은 사사로운 뜻에 가려서 (기력이) 소진되어 자포자기에 이릅니다. 그러나 성인은 바르게 길러서 해를 끼치지 않습니다. 하여, 성대하게 유행하여 호연한 상태가 됩니다. (중략) 그 큰 것으로 말하면, 우주에 충만하여 만화(萬化, 끝없는 변화)와 함께 한 몸이 됩니다. 상하에 함께 유행하여, 하늘과 땅이 서로 호응하고 음양이 조화되어 풍우가 알맞게 됩니다. 그러므로 기이한 상서가 모두 나타납니다. 이것은 한 사람의 학문에 있어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중략) 이기호는 아뢰기를, “(중략) 맹자는 홀로 이 경지를 마음속으로 체득하였고,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오묘함에 대하여 홀로 알았습니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이치를 깊이 궁구하여 확충해야합니다. 그러면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경지에 이르지 못할 염려가 어디 있겠습니까.” 허전 등은 ‘천인합일’에 관한 성리학자들의 전통적인 설명을 그대로 되풀이하였다. 16세기 이래 조선 선비들은 대체로 위의 인용문에서 읽은 바와 같이 믿었다. 그들은 맹자가 말한 호연지기를 길러, 천인합일의 경지에 도달하고자 했다. 사사로운 이해관계에서 벗어날 수만 있으면, 우주의 변화무쌍한 상태와 조화를 이룬다고 보았다. 결과적으로, 하늘의 뜻에 온전히 부합되어, 유교적 이상세계를 현실에서 구현할 수 있다는 견해였다.
최한기라는 불세출의 거인 그러나 19세기 후반, 다른 견해를 가진 선비도 있었다. ‘천인합일’에 관한 이해의 지평이 달라지고 있었다. 그 변화를 주도한 이가 혜강(惠岡) 최한기(崔漢綺, 1803-1877)였다. 우리 역사에서 그만큼 독특한 사상가는 드물었다. 놀랍게도 최한기는 허전, 이기호 등의 정통 성리학자들과는 완전히 다른 각도에서 ‘천인합일’에 관한 논의에 착수하였다. 그의 목소리를 들어보자(최한기, <<인정>>, 제9권, <만물 일체(萬物一體)>). “옛날 천인합일(天人合一)에 대한 주장을 보면, 혹자는 사욕(私慾)을 완전히 떨쳐버려야 흔연스럽게 하늘과 합치된다고 했다. 또, 혹자는 하늘이란 형질과는 거리가 먼 것임을 진실로 아는 것이라고 했다. 다른 이들은 성명(性命)으로 천인(天人)이 통한다고 했다. 모두 억측이요, 부회한 것이다. 전혀 타당하지 못한 말이다. ” 그야말로 폭탄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최한기는 종래의 논의를 몽땅 부정하였다. 그는 아마도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그의 말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어찌 천인일체(천인합일)에 대해서만 그러하겠는가? 교(敎)를 논하고 학(學)을 논한 여러 조목들도 모두 ‘운화(運化)의 기(氣)’를 밝히지 못한 데서 나온 것이었다. 때문에 요란하고 애매하였다.
사람과 사물의 생사를 따져보자. 기(氣)가 모여서 된 사람과 사물이다. 그 생장(生長)과 쇠로(衰老)에 따라 저절로 시작과 끝의 운화(運化)가 생기기 마련이다. (마지막에는) 그 기(氣)가 흩어져 대기(大氣) 속으로 되돌아간다. 이 역시 ‘천인일체(天人一體)’의 ‘운화’이다. ”(같은 글) 정작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실체도 없는 종래의 ‘천인합일론’이 아니라고 말했다. 최한기는 ‘운화의 기’를 밝혀야한다고 주장했다. 사물의 움직임과 변화를 추동하는 기운, 곧 ‘운화의 기’는 추상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인 것이 아니었다. 종교적인 신비현상도 아니었다. 최한기는 사물의 구체적이고 물리적 현상에 주목하자고 말했다.
현대적인 용어를 빌리면, 사물에 관한 자연과학적 또는 사회과학적 관찰과 분석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의 날카로운 학문적 통찰을 통해, 성리학은 이제 형이상학적 수사와 작별하게 되었다. 최한기는 근대의 새벽을 알리는 전령사(傳令使)였다. 나는 그렇게 확신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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