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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
정관성(원광대 강사)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어릴 때 살던 집은 종이로 바른 창밖에 없었습니다. 학교에는 유리창이 있어 교실 안에서도 밖을 훤히 볼 수 있는 게 너무 신기했습니다. 교실에 앉아서 창밖을 보는 게 참 좋았습니다.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고 창밖의 풍경에 푹 빠진 어린 학생을 선생님들께선 앞으로 불러 손바닥을 때리곤 하셨습니다. 그래도 고질병이 고쳐지진 않았습니다.
특히 눈이 내리는 날엔 도저히 수업에 집중할 수 없었습니다.
“너 또 창밖을 보고 있는데, 도대체 뭐가 그리 궁금한 거야?” 선생님께서 물었을 때 질문도 제대로 듣지 못했던 기억이 납니다. 앞으로 불려 나간 제가 했던 말이 생각납니다.
“하늘에서 눈이 내려온다고 했는데요. 창밖의 눈은 위로 올라가는 게 많아요. 그게 궁금해요.” 창밖을 서성이다가 바람에 위로 날리는 눈발이 참으로 신기했습니다. 교실을 기웃거리다가 쑥스러워 피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떤 눈발은 무관심한 듯이 보였고, 어떤 눈발은 창문에 바짝 붙었다가 휙 날아가는 것이 종이창문으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곤 했습니다.
눈발은 세상 사람들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궁금하여 바짝 다가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당연하다고 여기고 쓱 지나가는 사람이 있고, 맡겨진 운명을 거부하고 위로 솟구치다가 결국 떨어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이 쌓이고 쌓여 세상을 덮고 있습니다. 결국 모든 눈은 지상으로 낙하한다는 진리만 남습니다. 인생의 끝이 죽음이라는 진리와 다르지 않습니다.
최근 언론보도에는 정말 황당한 내용들이 봇물처럼 쏟아지고 있습니다. 오염된 눈처럼 화산재나 황사먼지가 되어 세상을 온통 더럽고 추하게 덮어버릴 심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믿는 대로 세상일을 판단하고 해석하고 싶어 합니다.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도 쉽게 변명거리를 찾고 변명을 오래 반복하다 보면 그걸 사실로 믿으려고 합니다. 예를 들어 남의 물건을 도둑질 한 사람이 도둑질이 아니라 빌리려고 한 거라고 자꾸 우긴다고 도둑질한 사실이 없어지진 않습니다. 다만, 반복하여 변명하다 보면 자기의 논리와 주장을 넘어 기억까지 편집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확증편향이라고 하고, 고사성어로는 아전인수(我田引水)라고 합니다. 자기에게 이롭고 편한 정보를 짜깁기해서 자기주장을 반복하고 심지어 그렇게 믿어버리는 것입니다. 빨간 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라보면 새하얀 눈이 빨갛게 보이고, 파란 나무는 검게 보입니다. 이런 상황이 되면 세상에 옳고 그름은 다 필요 없고 주장하는 자들의 아귀다툼만 난무하게 됩니다. 눈처럼 쏟아낸 자기 말들이 자기를 온전히 덮어줄 거라 믿겠지만, 과연 그럴까요? 적어도 눈은 정직합니다. 잠시 거칠고 더러운 세상을 덮기도 하지만 이내 녹아 세상을 그대로 내보입니다. 심지어 녹기 시작한 눈은 품고 있던 먼지들도 다 드러내 보이며 녹습니다. 일부 그늘과 산자락 높은 곳에서 버티던 눈들도 시간이 지나면 차차 녹아 대지에 스며듭니다. 눈의 정직함은 세상사와 많이 닮았습니다. 잠시 감췄던 진실도 언젠가는 다 드러내고 맙니다. 하나하나 쌓이지만 어느덧 두텁게 세상을 덮는 눈이 어느 순간 일제히 녹아내리듯 진실의 순간도 봇물처럼 터져 나오곤 합니다. 인생사 영원할 거 같지만 역사의 시간으로 보면 금방 녹아 사라지는 점도 닮았습니다.
이제는 입에 담기도 더러운 사람이 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로 국민 다수의 우울증과 화병을 조장하는 사람입니다. 자기에게 유리한 말을 어디서든 끌어와서 허물을 덮으려고 애를 씁니다. 자기 말이 자기 덫이 되어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될 것입니다. 그를 엄호하고 지지하는 자들의 허위와 억지도 잠깐 쌓였다가 녹아버릴 것입니다. 그들이 덮으려 했던 것들은 그리 오래 그들을 보호해 주지 못할 것이 불 보듯 뻔합니다.
절제와 진실이 없는 말들을 쏟아내는 걸 보면 무척이나 조급해 보입니다. 불안하고 무서울 수도 있습니다. 눈보라 휘날리듯 이리로 저리로 온갖 망발을 쏟아냈지만 쌓인 말들이 흙과 돌이 아닙니다. 휘발성 언어들이 퇴적층으로 영원히 모든 것을 묻어 줄 거라 믿는다면 큰 오산입니다.
여덟 살 나이에 창밖 세상이 참으로 궁금했던 시절. 모든 것이 신비롭고 알 수 없는 것으로 가득했습니다. 이제 50대 중반에 접어들어 세상의 이치를 다 알지 못하지만, 몇 가지는 겪어 알게 되었습니다. 진실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는 것과 인생사 어차피 녹아 대지로 스며들 거라면 조금 더 깨끗하게 살다 가는 게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그에게도 남은 기간 성찰과 참회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좋겠습니다. 적어도 마지막엔 진실의 대지에 평안히 스며들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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