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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누리 웹진 제79호 전북의 인권 역사 문화 유적지

인권누리 2022. 10. 12. 11:01

전북의 인권 역사 문화 유적지(81)

 

이번호의 인권역사문화유적지는 전주에 있는 친일파 이두황의 묘소입니다.

 

친일에 앞장선 인물 중 전라북도를 괴롭힌 친일파 이두황과 그 묘소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두황은 동학농민군의 토벌에 가장 앞장섰고,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했으며, 전라북도에 있던 넓은 토지를 수탈한 대표적인 친일파입니다.
이두황은 현재 전북 전주시 기린봉 기슭에 묻혀있습니다. 기린봉 아파트 깊숙이 무궁화 길을 따라서 올라가면 묘비와 이두황의 묘를 보실 수 있습니다.
이두황의 묘는 무덤과 비석, 혼유석 등 전형적인 일본형식 석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높이 2m에 이르는 비석에는 이두황의 행적으로 추정되는 글씨가 새겨져 있습니다.
비석 뒤편에 새겨진 이름들은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훼손되었습니다. 아마 비석에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것에 부끄러워 직접 지웠거나, 아니면 후손들이 선조들의 행동에 분노를 느껴 지운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무덤의 봉분은 둘레석에 생긴 균열을 제외하고는 풀이 많이 자라서 확인하기 힘들었습니다. 다만 풀 속에 숨겨진 표지판들은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이두황은 1858년 1월 11일 서울에서 출생하여 조선 말기에 흥해군수, 나주감목관, 육군 참령(參領) 등을 지냈으며, 대한제국기에는 전라북도관찰사, 일제강점기에는 전라북도장관을 역임하였습니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자 그해 3월 초토영군(剿討營軍)에 임명되어 동학농민군을 토벌하는데 앞장을 섰습니다.
7월에 장위영 영관(壯衛營領官), 8월 장위영 부영관(壯衛營副領官)으로 전임되었고, 동학농민군이 2차 봉기하자 10월 죽산부사(竹山府使) 겸 양호도순무영 우선봉(兩湖都巡撫營右先鋒)이 되어 농민군을 진압하였습니다.
특히, 동학의 북접(北接) 세력이 2차 봉기에 동조하여 보은에 모여들자 이들을 기습 공격하였습니다.
김개남(金開南)이 이끄는 농민군을 목천 세성산에서 격파하여 공주로 북상하던 전봉준(全琫準)의 동학군과 합세하지 못하게 만들었으며, 패퇴하는 동학군을 추격하여 해미·유구·노성·논산 등지에서 많은 동학군을 살육하고, 전주성에 재집결한 농민군을 물리치는 데 앞장을 섰습니다.

 

1895년 10월 8일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에 가담했습니다.
사건 당시 동료 훈련대장인 우범선(禹範善)과 함께 병사를 데리고 경복궁에 침입하여 광화문 경비를 담당하며 일본 낭인들을 도왔습니다.
이 일로 체포령이 내려지자, 아들 이진백(李鎭白)과 함께 부산으로 도주해서 일본인의 집에 숨었다가 그 도움을 받아 일본으로 망명해 10여 년간을 생활하였습니다.
1907년 8월 귀국해서 9월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특사로 사면되었습니다.
10월 중추원 부찬의를 거쳐 1908년 1월 의병전쟁이 치열하던 전라북도관찰사 겸 전라북도재판소 판사로 전임되어 의병 진압에 앞장섰습니다.
1910년 10월부터 전라북도장관에 임명되어 1916년 3월 사망할 때까지 재임했습니다.
1914년부터 1916년 3월까지 도장관으로 전라북도 지방토지조사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조선총독부의 토지조사사업을 하였습니다.
1916년 3월 9일 이두황은 평소 앓고 있던 신장염이 심해지면서 사망합니다. 당시 조선총독부 초대 총독 데라우치 총독이 조문을 보냈으며, 죽어서는 전주가 훤히 보이는 기린봉 기슭에 묻히게 됩니다.

“미래에 대한 인간의 무관심은 과거의 무관심에서 나온다”라는 로마 철학자 루크레티우스의 명언처럼 우리 근대의 아픈 역사를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